홍콩 졸업여행의 첫째날
단체여행에서 가장 번거로운 점은 아무래도 식사와 이동일 것이다. 특히 공항을 오고 가는 날은 짐까지 챙겨야 해 더욱 골치 아픈 여정이 된다.
우리가 4박 5일 간 머물기로 한 '홍콩 파크모텔'은 홍콩국제공항에서 A21번 버스를 타고 한 번에 갈 수 있다. 공항까지 이동이 용이하다는 것이 숙소를 택한 이유 중 하나이다.
A21번 버스는 다른 공항버스에 비해 대기줄이 길었다. 다행히 배차간격은 짧은 편이라 그리 오래 기다리진 않을 것 같았지만, 29명이 한 번에 못 탈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아이들에게 숙소로 가는 방법을 상기시켰다.
"17번! 17번 정류장에서 내려야 해요."
여행준비 과정부터 여행직전까지 여러 번 강조한 보람이 있게 여러 아이들이 목적지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특히 자폐적인 성향이 있는 일부 아이들은 숫자 기억, 길 찾기 등에 강점을 보여 여행에 톡톡히 도움이 되었다. 다른 아이들도 친구들의 말을 듣고 따라서 '17번 정류장'을 되뇌었다. 낯선 여행지가 주는 설렘과 긴장 속에서 아이들은 여느 때보다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운이 좋게도 우리 바로 앞에서 줄이 끊겼고, 29명이 한 번에 탑승할 수 있었다.
한 시간가량을 달려 버스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트리플 어플을 열어 저장해 놓은 숙소를 클릭하자 바로 구글 길찾기와 연결되었다.
숙소는 정류장에서 멀지 않았다. 건물입구가 작지만 사전에 사장님이 찾아가는 길을 상세히 안내해 주신 덕분에 헤매지 않고 숙소를 찾을 수 있었다. 상주하고 있는 직원 분이 한국말이 가능해 편하게 안내를 받고 체크인을 했다.
우리는 6층 전체와 5층 일부를 사용했다. 방 크기에 따라 2-5명씩 묵었는데, 방이 다소 좁은 편이라는 단점이 있었으나 그 외에는 꽤 만족스러웠다. 깨끗했고, 지하철 역과 버스정류장에서 가까웠으며, 모임이 가능한 거실이 있었고, 친절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료 조식이 제공되는 점이 아주 큰 장점이었다. 식당에서 생수만 시켜도 3, 4천 원을 내야 하는 홍콩의 높은 물가 속에서 아침마다 차려주는 한식은 단비 같았다. 게다가 본래 8시부터 조식이라고 안내되어 있었지만 일찌감치 일어나 돌아다니는 우리 아이들에게, 직원 분이 그때그때 식사를 챙겨주고 치워주셔서 매우 편하게 아침을 해결할 수 있었다.
물론 아이들은, 이런저런 장단점을 떠나 친구들과 함께라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했다. 경증의 발달장애를 가진 우리 아이들은 초중고 학창 시절 동안 또래 친구들과의 긍정적인 경험이 별로 없다.
친구들과 함께 하는 여행에 대해 아이들은 종종 '진짜 대학생이 된 것 같다'라고 표현하곤 한다. 부모의 품을 벗어나 내가 선택하고 내 발로 헤쳐나가는 여행. 거기에서 아이들이 느끼는 성취감은 생각보다 크다.
그것이 우리가 발달장애 아이들과 여행을 하는 이유이다.
첫날의 일정은 스타의 거리와 심포니 오브 라이트 구경하기. 둘 다 숙소에서 도보로 이동할 수 있는 거리에 있어 첫날의 일정으로 정했다. 저녁식사 시간이 가까웠기에 그룹별로 흩어져 식사를 한 뒤 심포니 오브 라이트를 구경하는 곳에서 모이기로 했다.
단체 자유여행의 중요한 팁은 '따로 또 같이'다. 같이 하며 맞춰나가야 할 영역과 개인의 자유를 보장해 줄 영역을 적절하게 구분해야지 여행이 편하고 만족스럽다.
그룹을 구성하는 것도, 식당을 정하는 것도 아이들의 몫이었다. 올해 3학년은 유달리 자발성이 부족하고 자기결정력이 약한 아이들이 많아 매번 뭐 하나 정하기가 어렵다.
사실 일상에서는 굳이 아이들이 무언가를 선택하고 움직이지 않아도 대부분의 문제가 해결된다. 우리 아이들의 일상이란 대부분 가정과 학교 등의 기관이기 때문에 가만히 있어도 시간이 지나면 수업은 끝나고, 식사는 학교에서든 가정에서든 정해진대로 나온다. 때로는 자기표현보다 조용히 순응하는 것이 더 ‘바른 행동’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시작부터 끝까지 아이들의 선택과 논의과정으로 진행되는 우리의 프로젝트 수업은, 누군가에게는 그게 왜 어렵냐 싶겠지만 우리 아이들에겐 한 걸음 한 걸음이 귀한 배움의 순간들이다.
특히 여행은, 아이들 스스로 자신들이 찾고 의견을 말하고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온몸으로 깨닫게 된다는 점에서 교육의 효과성이 탁월하다.
머뭇거리던 아이들은 하나둘 의견을 조율해 숙소를 벗어나는 친구들을 보자 조급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완탕면은 어때?"
"좋아!"
"나도 좋아!"
아이들은 기특하게도 배웠던 내용을 제법 기억해 냈다.
해외여행에서는 음식을 정하는 것 역시 쉽지 않기에 우리는 홍콩에서 유명한 음식도 미리 검색을 하고 공부를 했다. 음식도 공부하지 않으면 우리 아이들은 새로운 시도보다 기존에 익숙한 음식만 반복한다.
낯선 음식에 도전해 보고, 몰랐던 자신의 취향을 알아가며, 경험의 폭을 넓혀 앞으로 펼쳐질 삶에서 더 많은 선택지를 갖도록 하기 위해 여행 준비과정에서 먹거리에 대한 공부도 빼놓을 수 없었다.
식당까지 상세히 정하기는 어렵지만 먹고 싶은 메뉴 몇 가지를 메모해 놓는 건 가능했다.
메뉴를 정한 아이들은 트리플 어플에 나오는 주변 식당들 중 원하는 메뉴를 파는 가게를 찾고 길 찾기를 눌렀다.
구글지도에 뜨는 수많은 식당 중에 검색을 하는 건 다소 어렵지만 트리플에 정리된 정보 중에 고르는 건 한결 수월하다. 그렇게 가게를 골라 그룹별로 저녁식사를 하고 심포니 오브 라이트를 보기 위해 모였다.
심포니 오브 라이트는 밤에 빅토리아 하버에서 펼쳐지는 레이저 쇼이다. 고층 빌딩이 늘어선 홍콩의 야경을 즐길 수 있는 곳이라 이미 많은 관광객들이 모여 있었다. 우리도 거리를 걸으며 사진도 찍고 레이저 쇼가 펼쳐지길 기다렸다.
이윽고 8시가 되었고, 강 건너 화려한 빌딩에서 색색의 레이저가 쏘아졌다.
"와~! ......이게 다예요?"
".......설마. 더 하지 않을까...?"
하지 않았다. 뭔가 더 화려한 불빛이 있을 거라 기대했으나 다소 뜨뜻미지근하게 심포니 오브 라이트는 끝나버렸다. 원래 그런 건지 이날만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아이들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금세 다시 웃었다.
"그래도 야경은 멋있다, 그렇지?"
"내일은 디즈니랜드죠?"
재잘거리며 숙소로 돌아가는 발걸음에는 낯선 여행지에 대한 불안감도, 레이저 쇼에 대한 아쉬움도 슬금슬금 지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