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란 무엇인가
자유여행. 단어만으로도 왠지 설렌다.
'여행'이 주는 낭만과 '자유'가 주는 해방감. 얼마나 멋진가.
그렇지만 사실 '자유여행'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나의 자유여행의 가장 큰 걸림돌은 시간적 제약이다. 철학자 니체는 '하루의 3분의 2 이상을 자기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사람은 노예'라고 했다는데, 그의 기준대로라면 8시간 이상 근무하는 현대 직장인들 대다수는 자유시민이 못 된다.
전 직장은 학사일정으로 정해진 방학 이외에는 연차도, 월차도 없었다. 그마저도 일주일 이상 되는 전체 출근일과 주 1회 정도의 빈도로 돌아오는 일직, 당직을 포함하면 오롯이 쉴 수 있는 날은 며칠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연차보다 방학이 길다는 무적의 논리로 방학을 직원복지라고 말하며, 일이 생기면 갑자기 출근하라는 소환도 거리낌이 없었다. 똑같은 날을 쉬어도 내가 원하는 때에 쉴 수 있는 온전한 하루와 일방적으로 정해진 일정에 맞추어 쉴 수밖에 없는 하루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쉼은 내가 누려야 하는 권리이지 마음대로 줬다 뺏을 수 있는 혜택이 아니라는 것을 도통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이직을 한 지금은 이전보다 훨씬 유연하게 시간을 활용할 수 있지만 그래도 어쨌든 해야 하는 수업과 업무가 있고, 또 올해부터 갑자기 함께 살게 된 반려묘가 있다. 예상치 못하게 내 삶에 끼어든 고양이는 현재 나의 시간의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나의 자유의지로 선택한 동거이니 그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다고 말하는 건 모순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여행이 취미이던 나에게 긴 시간 집을 비울 수 없다는 건 상당한 제약이 된다.
그다음으로 큰 걸림돌은 금전적 제약이다. 작고 귀여운 월급으로 여행을 가려면 나름의 철칙이 있어야 한다. 여행이 예정되면 평상시 소비는 최대한 절제할 것. 여행 경비는 반드시 모은 여유 자금 안에서만 지출할 것. 그렇게 한정된 예산 안에서 여행을 하려면 우선순위를 정해 나에게 중요도가 낮은 것은 포기해야 한다.
예를 들어, 비좁은 이코노미 좌석에 열두 시간씩 구겨져 갈 때면 다음엔 돈을 더 모아 꼭 비즈니스를 타리라 다짐하지만 막상 금액을 보면 다음에도 꾹 참고 이코노미를 끊게 된다. 그 돈이면 하고 싶은 다른 것들을 더 많이 할 수 있을 테니까.
나에겐 비행시간 동안의 짧은 안락함보다 여행지에서 더 풍족하게 누리는 것이 중요하다.
'자유'란 내가 하고 싶은 모든 것을 제약 없이 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무엇이든 '선택'할 수는 있지만 선택에 따른 결과 또한 내가 '책임'져야 하니 현실적인 제약과 조건을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
현재의 즐거움을 위해 미래를 살피지 않는 결정, 나를 위해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 등은 자유라 주장하기 어렵다. 진짜 '자유'는 생각보다 복잡하고 까다롭다.
<길 위의 스튜디오>는 여행지의 결정부터 여행의 전 과정을 참가자들이 선택하는 자유여행이다. 하지만 참가자들의 선택을 무작정 따르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발달장애인들은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선택하고 결정해 본 경험이 많지 않다. 그리고 선택의 경험이 드문 만큼 책임을 져 본 경험도 드물다. 나의 선택에 어떤 결과가 따라올지 예측하기 어렵고, 문제가 예상되어도 심각성을 실감하지 못한다.
선택의 기회도 제한되지만 책임의 무게에서도 벗어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니 사소한 선택을 지나치게 망설이기도 하고, 반대로 무책임한 선택을 아주 과감하게 하기도 한다.
여행지를 선택하는 일 또한 마찬가지다. 자유롭게 여행지를 선택하도록 하면 쉽사리 결정을 못하고 갈팡질팡 하는 참가자들도 있지만 현실적인 일정이나 비용에 대한 문제를 고려하지 않은 무모한 결정을 하는 참가자들도 있다.
각 그룹별로 가이드북을 참고하여 여행지를 조사하고, 발표 및 논의 과정을 통해 여행지를 결정했을 때 두 그룹은 첫 번째 여행지로 대전과 부산, 국내여행을 선택했다.
그리고 한 그룹은 오로지 해외여행을 부르짖으며 싱가포르를 선택했다. 그것도 선택 이유는 마리나 베이 샌즈의 인피티니풀.
국내여행 먼저 다녀오고 천천히 진행해 보는 건 어떻냐는 소수의 의견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짜고짜 다수의 의견을 좇아 싱가포르 여행부터 추진하기에는 제약이 많았다.
그래서 다른 그룹들이 첫 번째 여행 준비에 돌입했을 때, 싱가포르 그룹은 우리가 갈 수 있는 일정과 항공권, 숙박비 등 예상 비용에 대한 검토를 먼저 했다.
<길 위의 스튜디오>의 여행 교육은 참가자들의 선택에 따라 다음 진행이 달라지는 완전 맞춤형 수요자 중심의 수업이다.
싱가포르에서 하고 싶은 것들을 충분히 즐기기 위해서는 4박 5일은 필요하다는 것, 직장 초년생이 많음을 감안하여 연차를 최소화하려면 추석 연휴나 연말 휴일을 끼고 가야 한다는 것, 그런데 추석 연휴 싱가포르 항공권은 다른 날짜에 비하여 50만 원 이상 비싸다는 것, 그리고 마리나 베이 샌즈의 1박 비용도 90만 원 정도 예상된다는 것을 확인하자 참가자들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래도 돈은 부모님이 낼 거라고 거침없던 학창 시절과 달리 현재 참가자들은 직장생활을 하고 있고, 여행비용도 자신의 소득으로 지불하는 비율이 꽤 높다 보니 이전보다는 상당히 경제관념이 생긴 듯했다.
사실 적당한 여행의 기준은 가정마다, 개인마다 차이가 크다. 그래서 <길 위의 스튜디오>는 시작 전 당사자와 보호자의 욕구를 조사했고, 또 당사자들의 직장소득과 연차 등을 고려하여 일정과 예산의 기준선을 정하고 있다.
'무조건 싱가포르'를 외치던 참가자들은 직접 정보를 찾아보고 문제를 깨닫자 드디어 마음을 바꿨다. 항공권 가격을 찾아본 후 비용이 적당하고 연차를 적게 낼 수 있는 연말로 싱가포르 일정을 미루고, 연말까지 시간이 많으니 국내여행을 먼저 다녀오기로 했다.
결과적으로는 다른 그룹들과 같은 결정이다. 아마 그냥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고 통보를 했으면 더 빠르고 효율적인 결론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같을지라도 누군가 일방적으로 결정을 내린 것과 스스로 고민하여 선택한 것은 과정 안에서 느끼고 배우는 것이 다르다.
'선택'에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리고 연습은 다른 누군가 대신해 준다고 내 것이 되지 않는다.
남들보다 더딜지라도,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칠 지라도, 한 걸음 한 걸음 내가 디딘 곳만이 나의 버팀목이 된다. 타인이 만들어준 발판은 쉽게 무너진다.
지금 참가자들이 시간을 들여 고민한 과정들은 분명 다음 선택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진짜 '자유'여행을 할 수 있고, 진짜 ‘내 삶’을 살 수 있다.
현실적인 제약을 고려하고, 함께 하는 타인을 배려하고, 선택에 따른 책임을 지는 것. 그리고 그 과정을 참가자들이 온전히 이해하고 납득하여 수용하는 것. 그것이 <길 위의 스튜디오>의 자유여행이다.
우여곡절 끝에 세 그룹의 첫 번째 여행지가 결정되었다.
물론 앞으로 선택해야 할 것이 산더미이다. 어디를 갈지, 어떻게 갈지, 무엇을 먹을지, 매 순간이 선택의 연속이다. 선택의 과정은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정보도 많이 찾아야 하고, 여러 선택지를 비교도 해야 하고, 머리 아픈 고민도 해야 할 것이다. 서로 의견이 다를 수도 있고, 선택을 번복해야 하는 상황도 생길 것이고, 선택의 결과가 생각만큼 좋지 못할 수도 있다.
어쩌면 마음 편히 남들이 정해준 대로 따르고 싶은 순간도 있을 것이다. 자유여행은 막연하게 상상하는 것만큼 즐겁고 신나지만은 않는다. 자유의 무게는 꽤나 무겁다.
모든 것을 스스로 해야 한다는 부담감, 정답이 없는 길을 헤매는 막막함, 잘못된 선택이면 어쩌나 싶은 불안감… 하지만 그 어려움 끝에 찾아올 성취감은 감히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클 것이다.
내 손으로 선택하고 내 발로 찾아 헤매는 자유의 여정. 내 힘으로 헤쳐나가는 그 길은 그 어떤 여행보다도 값지고 특별한 경험이 될 것임을 믿기에 우리는 용감하게 자유여행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