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주도적 여행의 효과
살면서 패키지여행을 간 건 딱 두 번이다.
그중 한 번은 땡처리로 나온 베트남 다낭 여행 상품이었는데,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찰나에 초임박한 상품을 싼 가격에 홀려 충동적으로 결제했다. 그리고 가이드는 나에게 '자유가 없다'는 것이 무엇인지 절절히 깨닫게 해 주었다.
여행 시작부터 베트남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설명하며 '절대 택시 같은 건 이용하지 말 것'을 여러 번 강조했고,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면 안 된다는 것을 에둘러 표현했다.
그리고 저렴한 상품 가격 대신 ’옵션'이라고 붙은 선택관광을 엄청나게 넣었는데, 한두 개만 선택해도 이미 지불한 상품 가격을 훌쩍 넘어섰다. 저렴한 상품 비용을 높은 옵션으로 메워보겠다는 의지가 강렬하게 느껴지는 가격이었다.
그렇지만 선택을 하지 않으면 인적 드문 시골길, 갈 곳이라고는 우리가 타고 온 단체버스 밖에 없는 외진 곳에서 4-5시간씩 대기를 해야 했다. 말만 '선택'이지 선택을 하지 않는 선택지는 없는, 강제 여행이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선택관광을 필수로 포함한 가격으로 상품을 판매했더라면, 그래서 그 상품을 선택할지 하지 않을지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더라면, 결과적으로는 같을지라도 받아들이는 나의 마음은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선택권이 배제된 여행은 몹시 빈정을 상하게 만들었고, 여행 전체를 부정적 기억으로 남게 했다.
나머지 한 번은 직원연수로 떠난 홋카이도 여행이다. 그건 내 돈을 내면서도 참가여부와 동행인조차 내 의지로 선택할 수 없는 여행이었고, 애써 긍정적인 마음을 가져보려 했지만 좀처럼 되지 않았던 시간이었다.
이후로는 다시 패키지여행을 가지 않았고, 아마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까 싶다.
자유의지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 주도성을 가지고 무언가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은 삶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다.
스스로 결정하고 주도성을 가질 수 있는 일이 없다면 사람은 자신감이 떨어지고 무기력해진다. 더 나은 결과를 위해 고민하지 않으며 힘들면 쉽게 포기하고,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면에 집중하게 되며, 실패에 대한 책임은 타인에게 돌린다.
13년간 일해 온 첫 직장에서 퇴사를 결심하게 된 것은 주도성을 가질 수 있는 일이 점점 없어지고, 앞으로도 나아지리라는 기대감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전 직원이 함께 머리를 맞댄 일은 일방적인 결정에 의해 뒤집히기 일쑤였고, 학생들의 선택을 존중하며 진행하던 학생주도적 활동들도 소통 없이 묵살되기 시작했다.
낮은 연봉과 높은 업무강도에도 십 년 넘도록 근무를 지속했던 것은 스스로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교육을 실제로 펼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었는데, 그 부분에 제약이 생기자 더 이상 일을 할 동력이 없어졌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시키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게 직장생활이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스스로 의미를 찾고 주도성을 가져야 일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무기력하게 그저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 것 또한 전 직장이었다.
발달장애인들과 자기주도적인 프로젝트 수업을 진행하며, 삶에서 자기 결정권과 주도성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했다. 원하는 것을 스스로 선택하고 준비하고 실행하는 이들의 눈은 반짝반짝거렸고, 의욕에 가득 차 능동적으로 움직였으며, 결과에 대해 누구보다 만족하고 뿌듯해했다.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학습을 할 때와는 확연히 다른 태도였다.
자기결정은 노력과 책임으로 이어지고, 더 큰 성취감과 또 다른 동기부여로 연결된다. 그 선순환의 즐거움을 알면 쉽사리 놓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그건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자기주도적 프로젝트 수업을 좋아하던 학생들은 새롭게 시작한 <길 위의 스튜디오>에 덥석 모여들었다.
현재 <길 위의 스튜디오>에서 자유여행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참가자들은 '단짝투어' 프로그램을 무척 즐거워한다.
어느 정도냐면 수업 외 시간에도 자발적으로 자료를 찾아 친구들과 공유하고, 쉬는 시간도 없이 두 시간 수업을 집중해 참여한다. 추석 연휴에도 수업을 진행하기를 원하고, 부득이한 사정으로 결석을 하면 그날 무슨 수업을 했는지 궁금해서 활동내용이 올라오는 밴드를 수시로 들락거린다. 그건 누군가 억지로 시켜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사실 <길 위의 스튜디오>는 여행을 하는 날보다 공부를 하는 날이 더 많다.
지난 4월 말부터 11월 초 현재까지 ‘단짝투어’ 세 그룹은 각각 대전, 홋카이도, 경복궁, 강릉, 횡성, 부산, 순천 등으로 2~3번의 여행을 다녀오고 12월 도쿄, 싱가포르 등의 여행이 예정되어 있다. 그리고 매주 1~2회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을 여행 공부에 할애하고 있다.
자유여행을 떠나기 위해서는 미리 준비해야 하는 것들이 아주 많다.
여러 여행지에 대한 정보를 찾고, 그룹 친구들과 논의를 통해 여행지를 선택하고, 여행지를 선택한 이후에도 어디를 가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먹을지 며칠이나 갈지 어떻게 다닐지 등등 모든 순간에 대한 정보검색과 논의 과정이 필요하다. 또 그 선택에 대해 예산, 시간, 동선 등이 적절한지에 대한 확인도 필요하고, 때로는 그 과정 안에서 계획에 수정이 필요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때도 있다.
예매가 필요하면 회원가입, 온라인 결제 등도 직접 해야 한다. 오전 7시 기차 예매를 위해 알람을 맞춰놓고 새벽부터 티켓팅에 도전을 하기도 했다. 주말 기차 예매가 그렇게 어려운지는 나도 생전 처음 알았다.
여행 준비 과정 속에서는 언어, 수학, 디지털 활용 등 발달장애인들이 어려워하는 학습이 융합되어 있다. 하지만 학습이라면 진작 질린 참가자들도 '여행'이라는 목표가 있기에 그 모든 과정을 어떻게든 해내기 위해 노력한다.
물론 습득의 정도는 개인의 능력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중요한 것은 모두가 노력하기에 조금씩 발전한다는 것이다. 동기부여가 매우 충분하게 된 만큼 학습효과는 높을 수밖에 없다.
여행을 떠나서도 마냥 편하지만는 않다. 지도 어플을 보며 길도 찾아야 하고, 돈을 쓸 때마다 가계부도 기록해야 하고, 때로는 요리나 설거지, 정리정돈 등도 모두 스스로 해야 한다. 뚜벅이 자유여행이다 보니 체력적으로 힘든 순간도 있고, 예기치 못한 문제가 생길 때도 있다.
그러나 스스로 선택했다는 것은 부정적인 감정을 소화하고 조절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내가 선택했기 때문에 충분히 감내할 만한 것이 되고, 잘못된 선택 역시 그저 실패로 남지 않는다. 일방적인 제공이라면 불평불만으로 끝났겠지만 자신의 선택이었기에 실패는 더 나은 내일을 위한 배움이 된다.
맛없는 음식을 골라도 이건 ‘비추’ 후기를 남기겠다며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반면에 스스로 선택했기 때문에 여행의 즐거움은 배가 된다. 멋진 풍경을 마주했을 때,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 재미있는 체험을 했을 때 참가자들은 단순히 여행에 대한 만족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선택을 잘했다며 뿌듯해했다. 다른 참가자들이 처음 그 정보를 찾고 의견을 낸 참가자를 칭찬하면 당사자는 자부심이 하늘을 찌른다.
직접 계획하고 준비한 여행을 무사히 마친다는 것은 참가자들에게 매우 큰 성취감을 준다. 패키지여행도 장점이 있겠지만 우리가 자유여행을 진행하는 이유는 스스로 준비하고 실행하는 여행에서 얻는 성취감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성취감은 자기효능감으로 이어지고, 자신에 대한 믿음이 되며, 삶을 이끌어나갈 자신감이 된다. <길 위의 스튜디오>의 여행은 단순히 즐겁고 신나는 유흥이 아니라 성장의 과정이고, 행복한 삶을 만들기 위한 씨앗이다.
나 또한 내가 계획하고 운영하는 프로그램 안에서 성장하고 행복해하는 이들을 볼 수 있다는 것에 성취감을 느낀다.
내가 만드는 여행, 내가 만드는 삶. 때로는 어설프고 때로는 불안해도 걸음마다 채워지는 행복이 있기에 오늘도 우리는 이 길 위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