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와 며느리(feat.오마이뉴스)

by 윤슬

직장동료로 만나서 18년째 모임을 이어가고 있는 4 총사가 있다. 출산도 같은 해에 해서 아이들도 4 총사, 아빠들도 4 총사이다. 큰아이가 돌이 되기 전부터 시작된 이 모임은 매년 여행을 가고, 코로나 시기 캠핑을 하며 더욱 친밀해졌다. 우리는 웬만한 친척들보다도 더 자주 보는 그런 사이가 되었다. 올해 1월, 4 총사 중에 한 가족이 일본 주재원으로 떠나게 되면서 아쉬운 이별을 했었다.


거의 1년 만에 일본에 살던 친구가 입국을 했다. 완전체 엄마 4 총사를 꿈꾸며, 우리는 지난 12월 26일 연말 모임을 했다.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크리스마스와 연말 분위기에 잔뜩 들떠 있었다. 한 해 동안 수고한 우리를 위해 선물을 준비해 나누기로 했다. 필자는 우정 반지를 선택했다. 손가락이 굵고 짧아 결혼반지도 잘 끼지 않는 필자에게는 큰 도전이었다. 한 친구가 해외에 나가 있기 때문에, 뭔가 연결된 고리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고생 마냥 신이 나서 반지를 끼고 인증샷을 찍으며 좋아했다. 한 친구가 게임을 제안했다.


“남편들한테 아내 손 찾기 게임할까?”

“좋아!”

필자의 손가락 특징을 감추기 위해 오므린 채로 사진을 찍고, 그 위에 숫자를 적어 단톡방으로 사진을 전송했다. 전략이 통했다. 남편들이 헷갈려했다. 반응이 도착할 때마다 우리는 까르르 웃었다. 아내들의 장난에 고민하며 성심성의껏 응답하는 남편들에게도 고마웠다. 1명 빼고는 모두 헛다리를 짚었다. 그만큼 난도가 높은 게임이었다. 정답을 맞힌 남편을 치하하며 우리는 맥주잔을 부딪쳤다. 그렇게 한참을 웃고 떠들 때 주재원 친구가 말했다.


“이 목걸이 시어머니가 결혼할 때 예물로 주신 거야. 17년 동안 한동네에서 거의 매일 같이 얼굴 보며 지냈는데, 일본 가니 헛헛하더라고. 시어머니 생각나서 보석함에 묵혀 놓았던 이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어. 나 원래 목걸이 잘 안 하는데, 하고 싶더라고.”

다들 그 예물 목걸이 구경에 한참이었다. 이윽고 친구가 말했다.


“어머니집 신발장에는 명품 신발들이 많아. 멋쟁이셨거든. 그런데 아프시고 난 후로는 내가 마트에서 사다 준 장화와 모자, 장갑을 여전히 착용하고 계시더라고. 좋은 것들 놔두고 왜 제가 사드린 것 착용하시냐고 물으니, 이게 더 편하고 좋으시대. 어머니도 며느리가 그리워서 그러시지 않았을까 싶어. 우리 고부는 목걸이와 장갑으로 연결되어 있어.”


친구는 목걸이를 만지작 거리며 눈가가 촉촉해졌다. 이야기를 듣는 우리들도 가슴 찡한 감동이 느껴졌다.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맺어진 시댁 식구들이 어떤 이에게는 고통이지만, 또 어 떤 이에게는 축복이기도 하다. 서로가 서로를 얼마만큼 배려하고, 사랑하고, 표현하느냐에 따라 그 관계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의 시부모는 서울에서 370km 떨어진 전라남도 무안에 거주하고 있다. 때로는 비행기로 2시간 30분 거리에 있는 도쿄보다도 차로 5시간 거리의 무안이 더 멀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 때문에 자주 뵙지 못해 전화 통화를 자주 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친정엄마의 병간호와 큰아이의 학교 폭력이 겹쳤던 그 시기에는 시댁에 내려가지도, 전화 통화도 어려웠다. 마음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시어머니는 그 기간 동안 그저 묵묵히 기다려주었다. 역대급 시련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아들, 며느리가 걱정되고, 손주와 사돈의 안부가 궁금했을 텐데 시어머니는 참아내었다. 필자에게 단 한 번도 먼저 전화를 건 적이 없었다. 시어머니의 배려에 너무 감사했다. 전화로 시어머니의 따뜻한 위로의 음성을 들으면, 필자는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하루하루가 전쟁 같았던 그 시기는, 무너지면 안 되었었다.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매주 하던 안부 전화가 끊기기를 7개월이 지났다.


친정엄마가 호스피스 병원에 입원하고, 큰아이가 무사히 중학교 졸업을 한 후에야 필자는 깊은 한숨을 토해내며 시어머니와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어머니 걱정되고 궁금하셨을 텐데, 그동안 연락 못 드려서 죄송해요.”

“아니다. 애썼다. 을매나 힘들었냐.”

“아들한테라도 전화해서 상황 물어보시지 그랬어요.”

“너희들 힘든데 어찌 나까지 힘들게 할까. 연락 올 때까지 기도하며 기다렸다. 이제 마음 놓아도 쓰겠다.”

시어머니의 배려에 눈물을 줄줄 흘리며 통화를 했었다. 본인의 걱정과 궁금증보다 아들과 며느리를 배려하는 어머니가 존경스럽고 감사했기 때문이다. 같은 상황에서 필자도 시어머니처럼 기도하며 기다릴 수 있을까? 자신은 없지만, 시어머니한테 배운 대로 필자도 노력해 봐야겠다.

연말연시 많은 사람들이 지인을 만나 회포를 풀고 즐거운 시간을 갖는다. 도시의 화려한 불빛과 맛있는 음식들 속에서 내 부모도 한 번쯤 생각해 보면 좋겠다. 귤을 까서 입에 넣고, 그 귤을 오물거리며, TV와 핸드폰을 보면서도 머리로는 자식들이 ‘잘 지내겠지, 전화 오겠지’하며 기다리는 자식 바라기 부모들이 있다는 것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필자는 새해 첫 주에 그리운 시부모님을 만나러 전남 무안에 내려갈 예정이다. 친구처럼 필자도 시어머니와 연결된 무엇인가를 준비해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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