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아 가려거든 가거라

by 현해당 이종헌

봄이다. 여름인 듯 연일 무더위가 계속되고 있지만 달력은 그래도 아직 5월에 머물고 있다. 겨울 가뭄이 봄까지 이어져 농부들의 시름이 깊어가는 즈음에도 산야의 초목들은 저마다 다투어 꽃을 피우고 초록의 옷을 갈아입으며 열매 맺을 준비에 열중이다. 넋을 잃고 유리창에 비친 교정의 수목들을 바라보다가 이런 날은 수업이고 뭐고 김밥 싸들고 소풍이나 갔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 아이들을 바라보니 아이들 표정도 따분한 기색이 역력하다.


철없는(?) 어른들이야 공부하기 좋은 때라고 말할지 몰라도 꽃피고 새 우는 백화난만, 만화방창의 봄날은 예로부터 소풍하기 좋은 날이지 공부하기 좋은 날은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5월의 학교는 늘 어수선하다. 4월 한 달 동안 아이들에게 멋진 추억을 선물했던 교육실습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교정은 흡사 휑한 바람의 골짜기인양 쓸쓸한데 그 사이 체육대회와 중간고사를 치렀으며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등등 이런저런 기념일들까지 줄줄이 이어졌으니 아무리 공자님이라도 이런 때, 배우고 때에 맞춰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라는 권학가를 설파하지는 못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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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한 한문시간, 한껏 몰려오는 졸음을 참으며 선생님을 응시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꼭 천진난만한 우리집 고양이 모모와 롱을 닮았다. 어젯밤엔 집 나간 모모를 찾느라 두 시간이 넘게 애를 태웠다. 아파트에 살다가 주택으로 이사를 오니 그동안 집안에만 갇혀 지내던 녀석들이 바깥세상 구경의 즐거움을 알았는지 틈만 나면 나가겠다고 아우성이다. 어젯밤에도 아우성에 못 이겨 현관문을 열어줬더니 천방지축 모모는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이집 저집을 들락거렸다. 그냥 믿고 기다릴 걸.... 혹시라도 길을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조바심이 결국 화를 부르고 말았다. 내가 붙잡으려는 것을 눈치 챘는지 골목에 주차된 자동차 밑으로 이리 저러 달아나더니 급기야 차들이 씽씽 달리는 큰길까지 나가 나와 아내를 경악케 했다. 숨 막히는 숨바꼭질 끝에 녀석을 붙잡았을 때, 안도의 한숨보다는 어쩌면 녀석과 오래 함께하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얼마나 밖에 나가고 싶었으면 그랬을까? 하는 애잔함이 가슴을 짓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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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자, 밖을 좀 봐라. 교사의 갑작스런 말에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창밖으로 향했다. 에이, 아무 것도 없잖아요, 선생님! 그래, 사람은 안 보이고 새들만 한가로이 노니는 구나. 교사는 문득 칠판에 강희맹의 시 한 구절을 썼다.


庭院無人鳥○○

뜰에는 인적 없고 새는.....


자, 인적 없는 뜰에서 새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는 것이 오늘의 과제다. 각자 상상력을 발휘해 시구를 완성해 보도록.... 교사의 말에 아이들의 눈은 금세 커졌다. 이윽고 각자 완성한 시구를 읊어보게 했더니, 새는 짝짓기를 하네... 낮잠을 자네.... 노래를 부르네 등등 다양하다. 가정의 달을 맞아서인지, 어버이를 생각하네 하는 녀석도 있고 또 어떤 녀석은 새는 단꿈을 꾸네 하며 제법 시적인 상상력을 펼쳐 보인다.


종이 울리고 교실 문을 나설 즈음 아이들이 일제히 물었다. 선생님 답이 뭐예요? 답? 여러분들이 말한 게 다 답이지 뭐! 아이들의 싱거운 웃음소리를 뒤로하며 교사는 교실을 빠져나왔다. 본래 강희맹의 시구는, 뜰에는 인적 없고 새는 날갯짓을 배우네. 라는 뜻의 鳥學飛이지만 그런 게 무슨 대수랴?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간 후 홀로 정원을 걸으며 강희맹의 시를 읊조려 보았다. 늙고 병든 사람에게 봄은 무엇보다 부러움의 계절이다.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아쉬움이 새 생명에 대한 경이로움으로 이어진다. 이제 막 날갯짓을 시작하는 새끼들의 서툰 몸짓.... 문득 돌이킬 수 없는 유년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솟아난다.


병을 앓은 후에 4수의 절구를 지어 최세원에게 주다


남쪽 창문 열고 종일토록 멍하게 앉았으니(南窓終日坐忘機)

뜨락엔 인적 없고 새는 날갯짓을 배우네(庭院無人鳥學飛)

자잘한 풀의 그윽한 향취 어디에서 나는지(細草暗香難覓處)

옅은 안개 저무는 햇살 속에 부슬부슬 비가 내리네(澹煙殘照雨霏霏)

2017. 5. 21. 현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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