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파도키아에서 머무는 마지막 날이다. 아침을 먹고 짐을 싸서 체크아웃한 뒤, 비행기를 타기까지 여섯 시간 정도가 남아있었다. 저녁 비행기를 예약한 것은 친구와 함께하는 일정을 염두에 둔 것이었지만 친구가 같이 못 왔기 때문에 그냥 혼자만의 시간이 되었다. 괜히 오후 시간을 예약했나 싶었지만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짐을 맡겨두고 숙소에서 나와 골목길 따라가다가 가판대 앞에 멈춰 섰다. 알록달록한 수공예 악세사리에 눈길이 갔다. 색색의 끈과 작은 비즈 구슬을 꿰어 모양을 낸 장신구들이었다. 악세사리를 좋아하는 친척동생 E가 생각났고, 그녀가 신혼여행을 다녀왔다가 내 생각이 났다면서 바티칸에서 팔찌를 사다 준 것도 떠올랐다. E에게 뭐라도 선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을 거는 점원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인 후 다른 가게를 좀 더 구경하고 오겠다고 했다. 할 일이 생긴 것은 기뻤으나 머릿속이 다시 복잡해졌다. 선물을 해서 좋을 게 없었던 경험은 많았고, E에 대해 내가 아는 건 적었다.
선물에 대한 나의 기억은 성공과 실패 중 실패 쪽에 확연히 기울어 있다. 특히 선물을 줄 때가 그러한데, 선물을 하고도 그닥 좋은 소리를 못 들었던 적이 많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밝힌 경우라면 난이도가 줄어들지만 깜짝 선물을 하는 경우 나는 늪에 빠지고 만다.
가장 실패했던 건 홍콩에서 선물을 사 왔을 때다. 대학생이었던 나는 임용고시를 치르고 나서 홍콩으로 떠났다. 과외를 해서 모은 돈과 장학금의 일부를 합쳐 충당한 여행이었다. 홍콩의 야경을 보니 살아있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휘황찬란한 불빛을 보며 마음 한구석에는 왠지 모를 죄책감이 일었다. 일하느라 고생하고 있을 엄마가 떠올라서였다. 혼자서 좋은 풍경을 보며 놀고 있는 게 미안했다. 호주머니가 넉넉한 건 아니었지만 나름 고급스러운 보석 가게에 가서 귀걸이를 샀다. 내가 봐 온 엄마는 늘 머리가 짧았고, 귀가 드러나는 단발이니 귀걸이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의 귀걸이는 오래된 것들뿐이어서 새것을 사주고 싶기도 했다. 공항 편의점에서는 조그마한 헤어젤을 샀는데 그건 남동생에게 줄 것이었다.
남동생의 반응이 긍정적일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지만 예상보다도 더 나빠서 그 애는 내가 가져온 걸 쳐다보지도 않았다. 연년생인 우리는 의지될 만한 무언가를 갖지 못한 상태로 각자 사춘기를 통과하느라 뾰족해져 남보다도 못한 상태였다. 부딪히던 남동생에게 나름의 용기를 내 손을 내민 거였는데 다음 날 헤어젤이 쓰레기통에 들어있는 걸 발견하고는 그나마 있던 정도 바싹 말라버렸다.
"야, OOO. 너 이거 왜 버렸냐?"
"필요 없어서 버렸는데."
내가 따지자 걔는 핸드폰을 보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엄마는 좀 다를 거라고 믿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엄마가 귀걸이를 받고는 처음 한 말은 "이거 진짜야?"였다. 그리고 무슨 이런 짜잔한 걸 사 왔냐며 핀잔을 주었다. 귀걸이는 서랍 속으로 갔다. 남동생에게 얻어맞고 속상한 마음을 엄마가 한 방 더 때렸다. 짜잔하다는 건 사투리로 못나고 보잘것없다는 뜻인데 그 말이 나까지 깔아뭉개는 것 같았다.
실패는 계속됐다. 남동생에게는 더 이상 선물하지 않았지만 엄마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남아있어서 선물을 멈출 수 없었다. 그러나 꽃을 사가면 금방 시들 텐데 차라리 돈으로 주지 그랬냐는 대답이 돌아왔고, 스카프를 사가면 하지도 않는 걸 괜히 사 왔다고 했다. 나는 선물을 한 대가로 무안함과 민망함을 감내해야 했다. 취직을 하고 나서는 큰 마음먹고 백화점에서 여우털 목도리를 샀다. 생일 선물로 고른 것이었다. 엄마는 목도리를 받자마자 얼마냐고 물어보고는 어차피 외투에 털이 달려있는데 너무 비싼 걸 사 왔다고 했다. 몇 번이나 이런 일을 겪으니 고맙다는 말 한마디 못 듣는 내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졌고, 선물할수록 아무도 즐겁지 않고 돈과 시간만 쓰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받는 이의 필요나 취향을 모르는 상태로, 값싼 물건을 사서 값비싼 반응을 바란 게 실수였다.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한의 호감을 누리려는 마음이 상대의 기쁨을 바라는 마음보다 더 컸나 보다. 선물 하나로 관계를 전환하고, 상대에게서 감사와 애정을 받아내고 싶어 하는 건 너무 큰 욕심일지도.
날은 흐리고 겨울비가 보슬보슬 내리기 시작했다. 마을을 어슬렁 거리는 강아지들 머리 위에 깨알 만한 빗방울이 옹기종기 내려앉았다. 오후 내내 동네 가게를 돌아다니며 E에게 줄 만한 팔찌를 찾아다녔지만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내가 아는 E를 곰곰 떠올려 보았다. 그녀는 패션에 관심이 많아 깔끔한 옷을 즐겨 입는다. 심플한 실버 악세사리를 좋아하는 E에게 수공예 악세사리는 번잡스럽게 느껴졌고, 괜찮아 보이는 건 터무니없는 가격이어서 차라리 한국에서 다른 물건을 사주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망설이다 팔찌 하나를 골랐지만 한국에 돌아와 다시 보니 너무 허접해 보여서 주지 않았다.
선물을 주는 것은 어렵다. 선물을 골라야 할 때면 내가 상대에게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얼마나 내어줄 수 있는지를 가늠하며 시험대에 오르는 것 같다. 지금까지 여러 번 실패했음에도 나는 포기하지 못하고 선물을 하곤 한다.
선물을 하는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이 된 것 같고, 상대를 생각하며 시간을 쓰고 선물을 고민하는 행위가 왠지 모를 위안을 주기 때문이다. 소소한 마음을 크게 부풀려 '나는 이만큼 너를 생각해'라고 발 담그고 있으면 진짜로 관계가 더 좋아질 것만 같다.
욕심은 늪과 같아서 해도 해도 발을 뺄 수 없다. 나는 애쓰면서 깊게 잠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