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침에 늦었는데 중앙 현관에 교장선생님이 서 계셨다. 어색하게 웃으며, 이런 적이 처음이라 당황한 척 걸음을 빨리 했다.
복도에 들어서자 장터가 따로 없었다. 어릴 적 잃어버린 쌍둥이를 만난 것처럼 간만에 상봉한 아이들 소리가 교실문을 넘었다. 떠들어대는 아이들에게 엄포를 놨다.
"너희들이 너무 떠드니까 아무래도 선생님이 제일 좋아하는 걸 해야겠어! 뭔지 알지?"
똑쟁이 건희가 사태를 수습하려고 쉿 소리를 내며 손가락을 가져다댔지만 말을 꺼낸 나는 무를 생각이 없었다.
"에이~ 우리 선생님 또 왜 그러실까아~" 어물쩡 애교로 넘어가려던 준환이는 잔소리만 얻어들었다.
과학책과 실험관찰 책을 펴 단원정리 문제를 풀고 중요한 내용까지 한 번 더 설명한 다음 시험지를 나눠줬다. 급식을 입에 넣으면서도 조잘대던 아이들이 함지박 속 콩나물처럼 고개를 숙였다.
시험지를 걷고 답안을 확인하다 빵 터졌다. 개구쟁이 태훈이가 머리를 싸매고 땀 흘리는 모습이 눈 앞에 그려졌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과학은 몰라도 센스는 만점인 듯
"자, 봐봐.
지진이 일어나면 어디부터 보호하라고 했지?
머리야, 머리! 머리를 감싸고 책상 밑으로 들어가야 해! 다들 기억나지?"
불과 몇 분 전에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는데.
맨 앞자리에서
"그런데, 책상 밑에 들어갔는데 바닥이 부서지면 어떻게 해요?" 하며
여느 때처럼 과히 발랄한 질문으로 나를 당황시켰는데.
그래도 이렇게 집중해서 들으니 질문까지 할 수 있는 거라고 한껏 칭찬해 놨는데.
머리를 보호하고 대피해야 한다는 설명을 어디로 까먹었는지 연필을 들고도 한참을 망설이던 태훈이는 선생님을 보호하고 대피해야 한다는 새로운 지진대피요령을 창작해냈다.
저 괄호를 채우려고 얼마나 고민했을까, 웃기고 귀엽고 짠해서 마음이 말랑말랑해졌다.
아침의 해프닝도, 곤두섰던 신경도 눈 녹듯 녹아내려 내 얼굴도 환해졌다.
비록 비 내리는 시험지에 태훈이는 우울해했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책상 속에 구겨져 있는 시험지를 보니 신경이 쓰여 지진 나도 태훈이가 선생님을 지켜줄 테니 걱정 없겠다고 아이를 위로했다.
태훈이는 금세 얼굴이 밝아져 언제 그랬냐는 듯 뛰어다녔다.
그래, 너도 행복, 나도 행복.
그거면 됐지.
그런데 5학년 되면 수업시간에 좀 더 집중해서 들어보렴..! 선생님 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