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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곰 Mar 24. 2024

경유지의 시간

상해 푸동 공항의 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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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공항은 한산하다.

기념품을 둘러보던 마지막 손님이 나가자 직원은 가게 조명을 끄고 문을 잠갔다.

구경이라도 하고 싶은데 정말로 할 게 없어졌다.

공항을 빠져나가는 자동차 불빛이 드문드문 이어진다.

여기서 퇴근을 못하는 사람은 여행객들 뿐이구나...


친구와 함께 오기로 했던 여행, 갑작스럽게 낙오된 단짝 대신 옆에는 13kg짜리 배낭이 있다.

나는 잠잠한 휴대폰을 들여다보다,

배낭을 메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다시 앉는다.

오밤 중에 이러고 있으니 거대한 저택을 떠도는 유령이 된 것 같다.


경유지에서 비행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유일한 목표는 시간을 죽이는 것이다.

기다리는 것 말고 해야 할 일이 아무것도 없을 때, 인간은 어떻게 행동하는가?

공항은 어느 미친 과학자가 설계한 거대한 실험실일지도 모른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다가 새삼 깨닫는다.

이토록 혼자라니.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눌 사람조차 없다니.


두려움이 일었다가 가라앉는다.

어쩌면 바라왔던 것도 같다.

관계와 업무와 책임과 계획에서 벗어나, 한국의 모든 것에서 물러나 온전히 홀로 존재할 수 있기를.

여행은 혼자 는 법을 배울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출발지를 떠났지만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았으니 여행이 시작된 것은 아니다.

여행을 시작하는 설렘과 한 차례 비행기를 타며 쌓인 피로가 맞물린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기대와 긴 기다림으로 인한 권태가 공존한다.

경유지의 아이러니다.



길게 늘어선 줄 끝에 선다.

이스탄불로 향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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