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 PD의 약속
얼마 전 하은 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하은 언니는 내가 말레이시아에서 유학했을 때 가장 친하게 지냈던 언니다. 마음이 잘 맞아 둘이 자주 주변 지역으로 여행도 다니며 친하게 지냈는데, 한국에 돌아와서는 각자 일로 바빠 요즘엔 일 년에 한 번도 겨우 보는데, 그런 언니에게 연락이 오니 반가웠다.
“다음 주에 토요일에 뭐해?”
“다음 주 토요일에 나 쉬어! 이번엔 진짜 될 것 같은데 볼까?”
“좋아. 그럼 토요일 오후?”
“언니 시간은 아직 정확히 말할 수 없지만, 일단 보기로 하자.”
그러나 3년째 주말 예능을 책임지고 있는 나로써 주말에 친구와의 약속을 지킬 확률이 없다는 걸 왜 자꾸 까먹는 걸까? 혹시 모를 변수에 대비해서 언니에게 애매하게 답변하면서도 한 편으로 걱정이 됐다. 그렇게 목요일 촬영이 끝나고, 금요일에는 내 예상대로 선배들이 선공개 작업을 시켰고 무사히 끝마쳤다. 여기까지는 내가 생각한 대로 흘러갔고 주말에는 언니를 만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아니 그럴 줄 알았다. 금요일 저녁 이번 도 며칠 밤을 새우고, 짐을 챙겨 퇴근하려는데 휴대폰 벨 소리와 함께 화면에 '고윤범'이라는 세글자가 떴다. ‘하 미친.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뭘 아니야. 아니면 나한테 금요일 저녁 9시에 전화를 왜 했겠어!’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으로 전화를 받았다.
“지연아 어디니?”
“왜요?”
“혹시 회사인가 해서.”
“혹시 회사면요?”
“너 회사구나, 잘됐다! 뭐 하나만 좀 부탁하자!”
내가 아직 회사라고 말도 안 했는데, 선배는 부탁 아닌 부탁 같은 추가 편집을 내게 맡겼다. 하. 불안한 예감은 왜 빗나가지를 않는지, 하지만 별수 있나 까라면 까야지.
“네 알겠습니다! 뭐 하면 될까요?”
“유튜브에 올릴 영상 만들면 돼. 출연자들 한 명씩 다 따로 해야 하는 건 알지? 그날 출연한 사람 17명 정도니까 금방 할 거야. 부탁할게!”
“17명이요?”
하지만 선배는 내 말을 듣기도 전에 전화를 끊었고, 나는 스트레스가 몰려 왔다. 오늘은 꼭 집에가서 사직서를 써야지. 하지만 나는 그날 집에 갈 수 없었다. 말이 쉽지 17명을 3분짜리로 편집하면 거의 1시간 짜리고 거의 방송 1개를 혼자 만드는 거나 다름없다. 평소 같으면 워낙 예상치 않게 추가 편집이 잡히니 못이기는 척 맥주 한 캔 먹으며 했겠지만, 이러다간 내일 하은 언니와의 약속을 지킬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불안과 짜증과 퇴사에 대한 생각이 몰려왔다. 하나 결국,
_언니. 진짜 미안해.
_왜? 못 나와?
_응.. 아직 3명 밖에 못했어.
_뭘?
_이런 거 유튜브에 올려서 누가 본다고…
_응?
_언니 아무튼 진짜 미안해. 내가 다음에 밥 꼭 살게.
_알겠어. 다음에 봐~
언니에게 카톡을 보내고 나니 찝찝함과 선배에 대한 분노 그리고 섣붇리 내 자유를 판단해 언니의 하루를 망치게 한 미안함에 오늘은 꼭 사직서를 쓰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분노의 마우스 질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