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은둔은 어떤 모습인가요
서장에는 은둔을 옹호하는 집단과 은둔을 반대하는 집단, 두부류로 나눠 이야기가 시작된다. 옹호와 반대 중 어느 쪽인가 생각해 본다면, 옹호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옹호라는 단어가 조금 더 유순하다는 생각이었는데, 반대는 은둔을 배척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은둔과 고독에 대한 개인적인 이미지는 긍정적이었다. 고독과 은둔의 사전적 의미와는 연관이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해석이다. 고독은 외적인 외로움을 느낄 수는 있으나 온전히 홀로 놓인 자신을 마주하는 상태라고 생각했다. 은둔 또한 비슷한 맥락이다. 세상을 피해 숨는 곳은 분명 자신을 위한 곳이 아닐까. 영원한 은둔은 부정적일 수 있으나 누구에게나 일시적인 은둔은 필요하다 생각한다. 세상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공간으로 숨어드는 일, 하루의 마무리로 일기장을 찾는 것과 같은 작용이 아닐지. 자신을 만나는 순간은 내면의 성장에 핵심적인 요소라 생각했다. 이러한 이유에서 은둔과 고독은 내게 그리 쓸쓸하게 쓰이지 않았다.
그러나 서장에서 은둔을 옹호하는 집단인 몽테뉴(프랑스 철학자)는 은둔을 공적인 생활에서 잠시 물러나는 게 아니라 영원히 떠나는 것을 뜻한다고 말한다. 은둔이 영원하다면 그것은 불행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문장이 있기 전 몽테뉴의 짧은 글에는 "우리의 행복은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자신을 다른 사람들한테 묶어 놓은 속박에서 느슨히 풀어놓으세요. 진정으로 혼자 살 수 있는 힘을 얻도록 합시다. 아주 만족스럽게!"라고 불행과는 거리가 먼, 오히려 에너지가 느껴지는 말이 실려있었다. <영원한 은둔>에는 공감할 수 없고 <행복은 자신에게 달려있다.>는 말만 공감했다. 뒤이어 은둔이 아닌 삶을 옹호하는 입장인 존 이블린(영국 문인)은 세상으로부터 숨어버리는 극단적인 은둔에 반대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자기 자신이나 일의 가치를 아는 이들은 야생 속에 은둔하거나 공적 임무를 저버리지 않고도 유용한 재미거리를 찾을 것이다."
"장담컨대 가장 현명한 이들은 서가가 잔뜩 있는 골방과 벽장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활발한 대화에서 나온다."
"혼자 있는 시간은 공적인 삶의 보조제일뿐 대체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활발한 대화'에서 밑줄을 그었다. 그리고 미묘해지는 생각을 정리하려 애썼다. 그러나 다음으로 이어진 글은 감히 내 것처럼 느껴졌다. 혼자 있는 시간은 공적인 삶의 보조제. 대체물이 아니다. 지난 은둔이 빠르게 스쳤다. 시간의 제약이 분명했던 은둔은 내게 일탈과 같았다. 삶의 주체가 된 적은 없었다. 혼자 거닐고, 혼자 사색하던 새벽. 은둔과 고독이 공존하는 시간에는 생각이 쌓였다. 그리고 그것을 정리하며 시간을 썼다. 정리가 끝날 때쯤엔 항상 대화를 갈망했다. 생각을 뱉어내면 말이 된다. 오고 가는 생각. 나누는 말. 대화를 통해 생각은 가치와 의미를 갖는다. 비로소 내게 기록되어 삶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일기에 쓰이는 대화는 모두 내 것이었다. 활발한 대화에서 나온 글. 대화라는 결론 없이는 모두 잡생각에 지나지 않았다.
'대화'라는 단어에 매료되어 "나는 은둔을 반대하고 있었던 걸까?" 의문을 가질 때 이블린의 집요한 글이 이어진다.
"모든 은둔의 결과는 우리를 무지하게 만들고 복수와 질투를 퍼트리고 마녀를 양산하며 세상을 황폐화하여 곧 소멸시킬 것이다."
이블린의 은둔은 어째서 '마녀'까지 간 걸까. 나는 결국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어디에나 속하기도 한다는 것을 인정했다. 단지 작은 문장을 낚아 올린 것에 짜릿할 뿐이다. 은둔과 고독의 의미가 재미있게 일그러지는 듯했다. 공적인 삶이 세상이라면 은둔은 세상 어딘가에 있을 작은 섬. 은둔의 날씨는 고독이며 계절은 주로 회복과 치유가 만연한 사색이었다. 나는 줄곧 은둔 안에서 여물어갔다. 내면은 사색의 계절을 거닐며 성숙해졌다.
*[낭만적 은둔의 역사_데이비드 빈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