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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붉은낙타 May 07. 2022

분노에 대하여

-주의! 이 글에는 애니<메이의 새빨간 비밀>의 스포가 왕창 들어있어요.




한창 육아의 늪에 빠져 있었을 무렵. 퇴근한 어느 날이었나, 주말이었나, 나는 나의 화와 분노를 주체하지 못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다 때려 부수고 싶었다. 아이들이 있었고, 집이었고, 나의 최선은 아무도 없는 방으로 가는 것이었다. 아이들에게 들어오지 말라고 엄포와 위협(아마도 내가 할 수 있는 뭔가 무시무시한건 다했을 것이다)을 하고는 혼자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옷방이었는데, 나는 나만의 또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듯 주르륵 걸려 있던 옷을 헤치고 옷걸이 뒤로 들어갔었다. 얼마를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 뒤로 나는 그 벽이 깨져라 두드려 부셨다. 그런다고 부서질 벽은 아니었지만, 손에는 나무로 된 망치 같은 걸 들고는 계속 벽을 내리쳤다. 잡고 있던 손은 벌겋게 되었고 나는 엉엉 울었고 목이 찢어지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 날의 기억 말고도 떠올리고 보니 분노 폭발의 기억들은 그물에 걸려 낚아올려지듯 하나씩 하나씩 올라온다. 조용한 분노만 하는 줄 알았더니 그런 것도 아니었구나. ‘분노’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나는 늘 내가 가지기 힘든 단어처럼 느껴졌다. 늘 누르며 살았었나 싶을 만큼 나에게는 없어야 할 감정처럼 말이다. 그래서일까 하나하나 너무 줄을 긋고 싶은 마음에 얼른 책을 사버렸다.


엄마는 줄곧 분노하고 있었을지 몰라도 겉으로는 늘 즐겁고 행복해 보였다. 엄마는 줄곧 침묵을 지키며 자신의 감정을 특정한 방식으로 배출하기를 택했고, 그럼으로써 다음의 귀중한 정보를 전해주었다. 분노는 홀로 느끼는 것이며 입 밖으로 꺼내 다른 이들과 공유할 가치가 없다는 것. 격분의 감정은 혼자만의 비밀이라는 것. 그 감정이 불가피하게 내뿜어져 나올 때 그 결과는 무섭고 충격적이며 파괴적일 수 있다는 것.- <우리의 분노는 길을 만든다> p13


‘분노는 우리 내부에서 경험되지만, 타인의 기대치와 사회적 금기로 인해 외부에서, 즉 문화 속에서 다뤄진’다고 하며 ‘역할과 책임, 권력과 특권이 분노의 프레임을 구성’한다. ‘관계, 문화, 사회적 지위, 차별에의 노출, 빈곤, 권력에 대한 접근성 등 이 모든 요인이 우리가 분노를 생각하고 경험하고 이용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데 ‘까다롭거나 칭얼대지 않는 여성’(누군가는 동의하지 않을지 몰라도)이었던 나는 전형적인 여성으로 ‘스스로 필요하고 바라고 느끼는 것에 대해 그동안 (대체로) 침묵’해 왔다


타인의 필요를 우선시하고 남들을 편하게 해 주려는 여성적인 습관은 우리를 종종 불리하게 만든다. 특히 나이가 많건 적건 여성들은 갈등과 긴장을 완화하고 우리와 타인을 위험에 빠트리는 상황을 피하거나 대치의 온도를 낮추기 위해 분노를 한쪽으로 제쳐두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언제나 어딘가 잠재하는 남성 폭력의 가능성에 적응하려면 어쩔 수 없이 화내기를 포기해야 한다고 납득하게 된다. (중략)

분노는 물과 같다. 아무리 막으려, 분산하고 부인하려 한들 결국 저항이 적은 곳으로 갈 길을 찾아간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여성들은 몸으로 분노를 ‘감지’ 하기도 한다. 처리되지 않은 분노는 우리의 외모와 신체, 식습관, 인간관계의 영역을 누비고 다니고 낮은 자존감과 불안, 우울, 자해, 나아가 신체의 질병에 연료를 공급한다. 그러나 그 피해는 신체적인 차원 이상이다. 분노에 관한 젠더적 관점은 우리가 스스로와 스스로의 감정을 의심하게 하고, 우리의 필요를 무시하게 하며, 도덕적 신념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포기하게 한다. 분노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스스로에게 무심해지고 사회가 우리에게 무심해지도록 용인한다. p23


어제는 <메이의 새빨간 비밀>을 보다가 너무나 귀여운 소녀 ‘메이’와 ‘레서판다’에게 반해버렸다. ‘메이’에게 분노라는 감정은 ‘메이’를 ‘메이’로 존재하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감정이었다. 방탄소년단과도 같은 ‘4타운’ 콘서트를 보는 것이 삶의 가장 중요한 목적인 주인공 메이는 엄마에게는 착한 딸이고 싶은 평범한 사춘기 소녀다. 그 ‘메이’가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레서판다’로 변한 자신을 발견하면서 영화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내용도 모르고 아무 생각 없이 보다가는 “어, 이게 뭐지?? 악! 너무 귀엽잖아!! 어쩜 좋아~“이러면서 봤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미치고 팔짝 뛰는 ‘메이’는 하루하루 미치고 팔짝 뛸 이 일생일대 엄청난 사실이 알고 봤더니, 엄마와 엄마의 엄마, 엄마의 자매들도 이미 겪은 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잉? 이게 무슨 일?”


이 ‘레서판다’로 변하는 상황은 선조대부터 시작된 전통이며 남자들이 전쟁에 나가고 여자들만 남았을 때 여자들이 가족을 지키기 위해 수호신에게 빌면서 가지게 된 초능력? 같은 것이었다. 이 변신은 뭔가 감정적으로 아주 격화되었을 때 일어나며 다행히 봉인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다만, 이 봉인 의식은 붉은 달이 뜨는 밤에만 가능하고 성공하기 위해서 ‘레서판다’로 변하는 상황을 자주 만들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4타운’ 콘서트를 보는 것인 일생일대 과업인 ‘메이’는 부지런히 ‘레서판다’로 변신하며 학교 아이들을 상대로 콘서트 티켓을 사기 위한 돈을 번다. 노심초사 걱정하며‘메이’의 ‘레서판다’를 봉인할 날만 기다리는 엄마와 엄마의 엄마, 엄마의 자매들은 봉인 날이 4타운의 콘서트 날과 겹치면서는 결국은 다른 선택을 하게 된 ‘메이’와 충돌한다.


중요한 것은 이 ‘메이’의 다른 선택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메이’의 ‘레서판다’가 너무 귀여웠다. 어쩔 거야! 누구도 그 치명적인 귀여움에 빠지지 않을 수 없으리라. 나의 분노는 무슨 색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나는 그와 어떻게 지냈을까. 영화를 보며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메이’에게 ‘레서판다’는 그냥 ‘레서판다’였고 그냥 자신이었다. 특별한 무엇이 아닌. 분노에 미쳐 날뛰는 나도 그냥 나였던 것이다. 내가 나의 분노를 보는 시선이 달라져야 내가 타인을 보는 시선도 달라질 것이라는 당연한 사실이 떠올랐다. 이것은 내가 나에게만 머무르지 않아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다. 내가 나를 보는 것처럼 나는 타인에게 불편함으로 강제하고 규제해왔기 때문이다.


<우리의 분노는 길을 만든다> 책에서는 여성으로 제한하였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한 인간으로 확장되어 읽힌다. 한 인간에게 “나 화났어”라고 말하는 것이 개인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왜 중요한지 좀 더 읽어봐야겠다. 인간의 정서에서 분노를 제거하는 방식이 어떻게 민주주의와 관련되고 권위주의라는 위험을 초래하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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