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운한 시대에 불운한 사회에서 불운한 신분으로 태어난 불운하게도 나약한 한 개인의 문제로 ‘차별’을 지우기는 어렵지 않다. 그렇게 차별은 아래로 낮은 곳으로 보이지 않는 곳으로 희생자들을 흘려보낸다. 보이는 듯 보이지 않는 아는 듯 모르는 듯 차별은 사회 곳곳에 스민다.
알 필요가 없기에 알려하지 않는 권력의 차별을 알지 못하면 나도 모르게 차별받다 차별하게 된다. 그런 사회에서 나 자신을 사랑하려 해도 쉽지 않겠지만, 너만 그런 게 아니라는 말이 위로가 되지도 않겠지만 자신을 보듬는 사랑도 하고 서로 위로도 하려 애써야 할 것이다.
권력을 넘어 차별의 폭력이 없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 그렇게 함께 살아 있어야 할 것이다. 살아있어야 자신의 폭력을 알 필요가 없는 이들에게 그들의 폭력을 알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차별이라는 폭력이 조금씩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도 모르게 차별의 폭력을 저지르는 이들을 방지하기 위해 최소한의 법과 제도가 도움이 될 것이다.
“뭐가 폭력인지를 설명하는 게 굉장히 오래 걸려요. 설득을 해야 되고 그 과정에서 피해자가 엄청 지치거든요. 근데 법안에서 이야기를 정해준다면 너무 좋겠다는 생각을 진짜 많이 했었어요.”(한국인 여성)
법은 사회를 유지하는 최소한의 장치일 뿐이다. 법이 차별을 야기하는 근원을 해소할 수는 없다. 하지만 폭력을 방치하지 않고 방지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 마저 없다면 차별이라는 폭력은 권력 유지를 위한 수단이 될 것이다.
약자들의 목소리를 들어주고 보호해 주기 위해서 정부가 있고 법과 제도가 있는 것인데 정부와 법과 제도가 힘 있는 자들의 목소리만 듣는다면 약자를 위한 법과 제도를 만들지 않을 것이다. 정부가 사회의 약자를 보호해주지 않는다면 정부도 사회도 없는 것이다.
“성별, 장애, 나이, 언어, 출신국가, 출신민족, 인종, 국적, 피부색, 출신지역, 외모, 혼인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형태,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전과,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학력, 고용형태, 병력 또는 건강상태, 사회적 신분”
한국인들이 겪었다는 차별의 요인들이다. 각자의 처지가 다른 상황에서 고통의 우위를 가릴 수는 없는 일이다. 차별에 따른 고통이라면 남의 고통보다 자신의 고통이 더 크게 느껴질 수 있다. 또한 자신이 당하는 폭력은 쉽게 알아차리지만 자신이 가하는 폭력은 알기 어려울 수 있다.
그처럼 차별이라는 폭력은 폭력을 모르는 폭력이 아닌가 생각한다. 모두가 모두의 차별과 고통을 챙겨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나보다 더 큰 고통, 모두가 겪는 공통의 고통에 대한 생각도 하면서 서로의 고통을 챙겨가야 할 것이다.
2021. 11.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