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글을 쓰는 사람은 ‘특수’를 ‘일반’화 해서는 안 된다는, 글을 읽는 사람은 ‘곡해’해서는 안 된다는 주의를 받는다. ‘일반화’는 ‘오류’, ‘곡해’는 ‘잘못’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오류’나 ‘잘못’이라는 판단은 누가 어떻게 하는 것일까.
올바른 해석이 무엇인지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곡해인지 아닌지, 일반화인지 아닌지 누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곡해’ 라거나 ‘일반화의 오류’라는 판단도 하나의 해석인 것이다. 그렇게 해석하며 마치 자신의 해석이 올바른 것처럼 곡해하거나 일반화하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는 것이다.
‘곡해나 일반화’를 주의해야 하지만 곡해라거나 일반화라는 판단 자체도 주의해야 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곡해나 일반화’ 일지도 모르는 해석을 마치 진실인 양 퍼트리고 믿게 만들려는 권력도 경계해야 할 것이다. 때로는 읽고 해석할 때 송곳 같은 독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영진,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웃으며 한 걸음> 104-105쪽.
윗 글에 쓰인 ‘일반화의 오류’, ‘곡해’만 아니라 마치 자신은 중립적인 듯 양쪽 모두를 비판하는 ‘양비론’까지 해서 셋 모두 비판을 받지만 결국 ‘누가 맞느냐’는 물음에 이르게 되면, 다시 이데올로기의 전장터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럴 경우 유리한 것은 자본과 권력을 가진 이들일 수밖에 없다. 자본 권력을 비롯해서 정치권력, 법조권력, 언론미디어 권력, 지식 권력일 수밖에 없다. 권력이 곧 진실일 수 있는 것이다. 권력의 일반화나 해석이나 비판은 진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늘 송곳 같은 독해를 하려는 독자들의 뾰족함은 소중하다. 한데, 그 뾰족한 해석도 하나의 무기력한 해석에 그칠 수 있다. 그러니, ‘사태 자체를 보자’거나, ‘사태 자체에 충실하자’는 아도르노의 주장은 효과가 있을 것이다.
神이 아닌 이상 그 누구의 해석도 절대적으로 옳을 수 없지 않는가. 아니 神의 말씀이라고 해서 믿을 수 있겠는가. 그 해석이 ‘일반화의 오류’인지, ‘곡해’인지, ‘양비론’인지에 대한 해석에 대한 판단 기준은 ‘사태 자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2025. 10.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