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아이를 낳는 것은 바람직한 선택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아이를 갖는 것 또한 아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철학 용어로 ‘비대칭(Asymmetry)’이라고 하며 정당화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비대칭 문제와 관련하여 일반적인 설명들과 그러한 설명들이 쓸모없는 이유에 대해 살펴보지는 않겠다. 나는 이와 관련된 다른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철학자 데이비드 베네타(David Benatar)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낫다: 출생의 해악(Better Never to Have Been: The Harm of Coming into Existence)>이라는 흥미진진한 제목의 책을 내놓은 바 있다.
여기서 베네타는 앞서 언급했던 비대칭의 개념을 다루고 있다. 그는 고통을 겪게 될 아이를 낳는 선택은 그 아이에게 피해를 입히지만, 행복한 삶이 예상되는 아이를 낳는 선택은 그 아이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 아이가 평생 심각한 고통을 겪도록 하는 것은 올바른 선택이라고 할 수 없다. 비록 그것이 자손을 퍼뜨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모든 인간은 어느 정도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고, 인류가 생존을 이어가는 한 미래의 아이들 중 일부는 분명히 심각한 고통을 겪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류의 생존은 일부의 아이들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히고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베네타는 “인간의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지 않다”고 말한다. 우리의 욕망은 대부분 충족되지 못하고, 때로는 만족감을 얻었다 하더라도 삶의 부정적인 요소를 상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기후변화의 문제를 대단히 심각하게 여긴다. 일부는 인류의 탄소 발자국(Carbon footprint) 크기를 줄이기 위해 육식이나 해외여행을 중단하고 있다. 그러나 기후변화로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을 세대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우리에게 미래 세대가 없다면 기후변화에 대해 죄책감을 느껴야 할 이유도 줄어들 것이다. 자, 만약 우리가 인류의 마지막 세대라면 어떻겠는가?
인류의 생존이 우리 세대에서 멈춘다면, 미래 세대의 희생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욱 가벼운 마음으로 종말의 길로 들어서게 될 것이다. 인류의 종말에 대해 모두의 동의를 이끌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럴 수 있다고 상상해보자. 이 시나리오에서 잘못된 점은 무엇인가?
베네타보다 좀 더 낙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려고 해도 이러한 인류 종말의 시나리오를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 그 이유는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면서, 즉 무엇보다 미래 세대에게 악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는 죄책감을 덜어주면서 아무도 불행하게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불행을 맞이할 미래 세대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인류가 사라진 세상은 지금보다 더 나을 것인가?
지금과 같은 세상과 지구상에서 이성적인 존재가 완전히 사라진 세상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한다고 가정해보자. 또한, 지구상에서 이성적인 존재가 완전히 사라진 세상을 선택할 때, 모든 사람이 그 결정에 동의할 것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어느 누구의 권리도 침해한 것이 아니다. 적어도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의 권리는 침해당하지 않는다. 그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는 이 세상에 존재할 권리가 없는가?
나는 이성적인 존재가 사라진 세상에 대한 선택은 잘못된 결정이라 믿는다. 대부분의 삶이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인류가 앞으로 한 세기 또는 두 세기 더 존속하게 된다면 과거의 실수로부터 깨달음을 얻고, 지금보다 고통이 훨씬 더 줄어든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나는 분명 낙관주의자다. 그러나 이런 선택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내가 처음에 던진 중요한 질문을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삶은 과연 살아갈 가치가 있는가? 미래 세대의 권리를 위해 우리는 그들이 세상에 태어나도록 해야 하는가? 그리고 미래 세대가 고통을 겪게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인류의 존속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피터 싱어, <더 나은 세상 - 우리 미래를 가치 있게 만드는 83가지 질문>, 박세연 옮김, 예문아카이브 2017. 52-56쪽 일부 발췌.
내 주변에도 지구의 상태에 절망하며 ‘지구가 빨리 망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종종 있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진심인 듯하다. 만일 그들이 지구를 ‘빨리’ 망하게 할 수 있다면 나는 동참할 의사가 있다.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빨리’ 망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점에서 나는 ‘인류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을 던지며, “과거의 실수로부터 깨달음을 얻고, 지금보다 고통이 훨씬 더 줄어든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것들을 작은 것이라도 찾아서 하겠다는 생각뿐이다.
그것이 낙관주의든 뭐든.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못 찾더라도 계속 질문하면서 더 나은 세상을 의식하며 할 수 있는 것들을 할 뿐이다.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왜 안 그래야 하는지도 모르겠어서.
2025. 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