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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를 모두 소진한 ‘인신세’

by 영진

외부를 모두 소진한 ‘인신세’


인류의 경제 활동이 전 지구를 뒤덮은 ‘인신세’란, 수탈과 전가를 하기 위한 ‘외부가 모두 소진된 시대’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간 자본은 석유, 토양 양분, 희소금속 등 쓸모가 있는 것이라면 죄다 쥐어짜왔다. 이런 ‘채굴주의’extractivism'는 지구에 큰 부담을 지울 수밖에 없다. 자본이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필요한 ‘저렴한 노동력’이라는 미개척지가 더 이상 없듯이, 채굴과 전가를 위해 필요한 ‘저렴한 자연’이라는 외부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35-36


이런 흐름에는 자본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한계가 존재한다. 자본은 무한한 가치 증식을 목표하지만 지구는 유한하기 때문이다. 외부를 모두 소진하면 지금껏 해왔던 방식이 통하지 않게 된다. 위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것이 ‘인신세의 위기’의 본질이다.36



냉전 종결 이후 무의미하게 버린 시간


경제학자 케네스 볼딩은 일찍이 “유한한 세상에서 지수함수 같은 성장이 영원히 계속되리라 믿는 이는 정신 나간 사람이거나 경제학자, 둘 중 하나다.”라고 한 바 있다. 그로부터 반세기 넘게 시간이 흘러 환경 위기가 심각해졌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경제 성장만 좇으며 지구를 파괴하고 있다. 경제학자의 사고방식이 우리 일상에 그토록 깊게 뿌리를 내린 것이다. 우리는 “정신 나간 사람”일지도 모른다.36-37

어른과 달리 아이들은 이성을 유지하고 있다. 어른들이 은폐한 기후 변화 대책의 위선을 파헤친 사람은 바로 스웨덴 환경운동가 크레타 툰베리다. ‘학교 파업’으로 유명해진 크레타 툰베리는 고등학생이던 15세 때, 정치가들이 인기를 끌기 위해 ‘환경 친화적이며 영원히 계속되는 경제 성장만 말한다’고 엄중하게 비판했다.37


크레타 툰베리는 자본주의가 경제 성장을 우선하는 이상 기후변화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자본주의는 냉전 체제가 무너진 후 세계화와 금융시장의 규제 완화 덕에 생겨난 돈벌이 기회를 좇는 데 정신이 팔려서 기후 변화 대책을 세울 수 있었던 귀중한 30년을 무의미하게 흘려보냈다.37


잠시 역사를 돌이켜보자. 1988년, NASA(미국항공우주국)의 연구자였던 제임스 핸슨은 “99퍼센트 확률로” 기후 변화가 인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미국 의회에서 경고했다. 게다가 그해에는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가 UNEP(유엔환경계획)와 WMO(세계기상기구)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 무렵에는 기후 변화 대책을 위한 국제협정이 체결될 희망이 있었다. 만약 그때부터 대책을 세우기 시작했다면,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매년 약 3퍼센트씩 천천히 줄이는 방식으로 기후 변화 문제를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38


핸슨의 경고는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그 직후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으며 나아가 소련이 붕괴하면서 미국형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를 뒤덮었기 때문이다. 구舊 공산권의 저렴한 노동력과 시장을 눈독 들인 자본주의는 새로운 미개척지를 향해 진격했다. 경제 활동이 점점 확대되면서 자원의 소비도 한층 가속했다. 인류가 지금껏 사용한 화석연료 중 약 절반이 1989년 냉전 종결 후에 소모되었을 정도다.38


크레타 툰베리가 그토록 격렬하게 어른들을 비판한 이유는 눈앞의 이익만 좇느라 귀중한 기회를 날려버린 무책임함에 분노했기 때문이다. “당신들이 과학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은 지금까지의 생활을 계속할 수 있는 해결책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해결책은 더 이상 없다. 당신들, 어른들이 행동하지 않고 시간을 버렸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악화된 이상 지금의 시스템으로는 해결책이 나올 수 없으니 “시스템 그 자체를 바꿔야 한다”. 아이들의 주장에 부응하려면 우리 어른들은 우선 현재 시스템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다음 시스템을 준비해야 한다. 당연하지만, 크레타 툰베리가 대책 없는 시스템이라 한 것은 자본주의를 가리킨다.39-40




ㅣ출처ㅣ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기후 위기 시대의 자본론

사이토 고헤이, 김영현, 다다서재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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