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작품을 아름답다고 칭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by 영진

예술 작품의 개념은 성공의 개념을 내포한다. 실패한 예술 작품들은 예술 작품이 아니다. 근사치라는 말은 예술에 이질적이며, 어중간한 것은 이미 나쁜 것이다. 그런 것은 특수화의 매체와 결합될 수 없다. 어중간한 예술 작품들은 이와 친화적인 정신사가들이 높이 평가하는 군소 대가들의 기름진 토양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루카치가 ‘규범적 예술 작품’이라고 거리낌 없이 옹호한 작품과 유사한 이상을 상정한다. 그러나 예술은 규범의 그릇된 보편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규범적인 작품들을 허용하지 않는다. 또한 그 때문에 규범에 부합하는 것이든 혹은 그러한 규범으로부터의 거리에 따라 그 위상을 얻게되는 것이든 간에 아무튼 예술은 어중간한 작품들을 허용하지 않는다. 예술 작품의 등급을 매길 수는 없다. 즉 예술 작품의 자체동일성 때문에 더 낫다 혹은 더 못하다는 차원은 무의미해진다. 성공을 위해서는 일관성이 한 가지 본질적인 계기다. 그러나 그것이 유일한 계기는 아니다. 예술 작품이 무엇인가를 다룬다는 사실, 통일성 속에서 개별자의 풍부함이 나타난다는 사실, 극히 냉담한 작품들에조차 무엇인가를 주는 듯한 제스처가 있다는 사실 등은 일관성이라는 좌표에 귀착되지 않더라도 예술에 현존하는 요구 사항들의 본보기다. 아마 이론적 보편성을 매체로 삼을 경우, 그러한 것들의 풍요로움에는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요구 사항들로 인해 일관성 개념과 아울러 성공 개념도 의심스럽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성공 개념은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모범생을 연상시킴으로써 훼손되기는 한다. 그렇지만 성공 개념은 예술이 통속적 상대주의에 빠지지 않으려면 불가피하다. 또 그것은 어느 예술 작품에나 내재하여 예술 작품을 비로소 예술 작품으로 만드는 자체비판 속에 살아 있다. 일관성에는 일관성이 예술의 전부는 아니라는 점이 내재한다. 이를 통해 철저한 일관성 개념과 고루한 개념을 구분된다. 단지 전적으로 일관성만 지니는 것은 일관성을 지니지 못한다. 단지 일관성 있을 뿐이고 형식화되어야 할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면, 자체로서 어떤 것이기를 그치고 대타적인 것Für anderes으로 변질하고 만다. 이것이 고루한 유려함이다. 고루한 작품들은 쓸모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의 논리성이 종합해야 할 계기들은 아무런 반대 충동도 만들어내지 않으며, 또 엄밀히 말해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작품들의 통일성을 이루는 작업은 불필요하고 동어반복적이며, 또 이 통일성은 어떤 것의 통일성으로 등장함으로써 일관성도 없다. 이런 유형의 작품들은 무미건조하다. 일반적으로 무미건조함이란 사멸한 미메시스의 상태다. 슈베르트처럼 특히 뛰어난 미메시스적 예술가는 기질 이론에 따르면 다혈질이고 다습질이다. 예술은 미메시스적으로 산만한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술은 산만한 것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산만한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예술의 명예를 위해 그것을 말살하는 통일성은 그러한 일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자체의 진리내용으로부터 형식이 나오는 예술 작품은 특히 성공한 것이다. 그런 예술 작품은 그것이 형성된 존재 혹은 인공적인 것이라는 흔적을 떨쳐버릴 필요가 없다. 환각술적인 예술 작품은 그 대립물이다. 이런 예술 작품은 어쩌면 그것을 성공하도록 만들 수도 있는 요인을 견뎌내지 못하고, 자체의 현상을 통해 성공한 듯한 모습을 취하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한 것만이 예술 작품들의 도덕이다. 이 도덕에 따르면 예술 작품들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 정당하게 예술에서 요구하는 자연스러운 것에 접근한다. 반면에 예술작품들이 자연스러운 것의 형상을 자체의 지배 아래 두면 당장 그것과 멀어진다. 성공 이념은 조작을 용납할 수 없다. 성공 이념은 객관적으로 미적 진리를 요구한다. 물론 작품의 논리성이 없다면 미적 진리도 없다. 그러나 미적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각 작품의 문제를 통해 첨예화되는 전체 과정에 대한 의식이 필요하다. 객관적인 질 자체도 이 과정에 의해 매개되어 있다. 예술 작품들은 오류를 포함하며 이로 인해 소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로 그 과정에 대한 의식으로서 그런 판결을 무효화하는 어떤 올바른 것은 개별 오류를 정당화할 수도 있다. 작곡 경험을 근거로 쇤베르크의 「올림바단조 현악 4중주」 제1악장에 이의를 제기한다고 해서 꼭 고지식한 음악 선생이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는 제1주제가 비올라를 통해 직접 계속되면서 음에 충실하게 미리 제2주제의 동기와 연결된다. 이로써 그것은 경제성을 훼손하는데, 아직도 통용되는 주제상의 이원론에서는 그러한 경제성이 의무적인 대조를 요구한다. 그러나 전체 악장을 하나의 순간으로 생각한다면, 그러한 유사성은 다가올 부분을 미리 암시하는 것으로서 의미심장하다. 또 다른 예를 들면, 말러의 「교향곡 9번」 마지막 악장에 대해서는 악기 편성 논리상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주악절이 다시 등장할 때 그 멜로디가 같은 성격의 음색으로 즉 호른 독주로 두 번 계속해서 나타나며, 이로써 그것은 음색 변조의 원칙을 지키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음이 처음 나타날 때 너무 절실하고 본보기가 되는 것이어서 음악 자체가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것을 따른다. 이 점에서 그 음은 올바른 것이 된다. 어떤 작품을 아름답다고 칭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하는 구체적 미학 물음에 대한 답은 그처럼 자기반성적 논리를 꼼꼼히 실행하는 데에 있다. 그러한 반성들을 경험적으로 종결지을 수 없다고 해도, 이 반성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 문제의 객관성은 변하지 않는다. 상식은 내재비판의 단자론적 엄밀성과 미적 판단의 절대적 요구가 결합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모든 규범이 작품 구조의 내재성을 벗어나는데, 작품의 구조는 규범이 없으면 우연에 머문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예술 작품들에서 거부되는 보편과 특수의 추상적 구분을 영속화한다. 단자 속에서 보편성의 구체적 효력을 가능케 해주는 계기들을 통해, 우리는 한 작품의 올바른 면과 잘못된 면을 작품 자체의 척도에 따라 지각할 수 있다. 자체로 구조를 이룬 것 혹은 서로 결합될 수 없는 것 속에는 어떤 보편적 요인이 감추어져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그 특유의 형태로부터 떼어내어 실체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429-432




ㅣ출처

미학 이론

테오도어 W. 아도르노 지음, 홍승용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5.

원제 : Asthetische Theorie





아도르노 [미학이론] 읽기


매거진의 이전글아도르노와 문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