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긴다는 것이 승패를 떠나 승패로부터 자유롭거나 초연해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승패를 떠나거나 말거나 승부의 과정에 치열하게 몰입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런 의미에서라면 두 사람은 승부를 즐겼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들 중 누구도 패하지 않은 모두가 승자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승리의 기쁨이나 패배의 굴욕에 지배당하지 않은’ 자신의 삶을 그들은 즐긴 것이다.(승부를 즐겨라!?)
만일 올리버가 끝까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다면 하고 가정을 해 보지만, 사랑하지 않는데 사랑해 줄 수도 있을까라는 의문도 가져보지만, 그럴 수 없었을 것이라는 답이 돌아온다. 그만큼 올리버는 엘리오를 사랑했던 것이고 그 순간만큼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후회하지 않을 사랑을 한 것이다. 그것이 올리버의 사랑일 것이다.(네 이름으로 날 불러줘)
시간이 흐른다고 저절로 와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맛’을 떠나서도, 와인이 그저 와인이 되기 위해서도 사람들이 함께하는 노동이 필요하다. 그 노동은 기후와 토양 등 자연의 이치를 잘 알고 따르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것은 ‘때’를 아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씨를 뿌릴 때, 거름을 줄 때, 수확할 때를 알아야 한다. 와인이 숙성되어 ‘제 맛’을 내기 위해서는 ‘제 때’에 맞는 필요한 노동을 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바라는 맛을 내기 위해서는 그 노동에 기술과 정성도 더해져야 할 것이다.(‘제 맛’을 내는 시간)
바르다와 JR처럼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얼굴을 사진에 담는다. 사진에는 사람들의 얼굴과 함께 자신의 ‘생각’이 담긴다. 그 생각은 자신이 바라는 사람과 세상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의 그 생각을 담았다는 것이 중요할 것이고 이미 갖고 있을 그 생각을 잘 담았느냐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바르다와 함께한 시간들)
재판정이 밝힌 언론이 국민을 섬겨야 한다는 말의 의미는 그러할 것이다. 자신들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국가권력이 행한 국민들을 기만하는 거짓을 밝혀낼 때 언론은 국민들을 살리는 ‘산소’가 된다는 것. 진실이 곧 국민을 섬기는 일이라는 것. 그렇게 ‘더 포스트’의 발행인 캐서린의 말처럼 언론이 ‘역사의 초고’를 쓰게 되는 경우도 있다. ‘더 포스트’에게 박수와 존경의 마음을 보낸다.(알릴 것인가 말 것인가)
우리는 누구나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지는 못하더라도 자신의 고통을 여러 예술 매체를 통해 승화시킬 수 있을 정도의 행복한 예술가는 될 수 있을 것이다. '될 수 있음'에 대한 근거는 우리들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지금껏,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만들어 온 것처럼 말이다.(즐거운 활동)
아도르노의 위 글을 통해 헤겔에게도 아도르노에게도 ‘모순을 정면 돌파’하려는 ‘관념’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도르노가 ‘정면 돌파’를 이끌어 내는 사유 방식 혹은 전략은 ‘촘촘한 미시론적 사유’와 ‘내재 비판’입니다. 현실의 모순과 한계를 드러내어 비판하는 것입니다. 한계를 넘어설 때까지 말입니다.(정면돌파라는 관념)
아도르노에게 사유는 역사적이며 ‘시간적 핵’(Zeitkern)입니다. ‘시간적 핵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타이밍(timing)이 있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진리는 영원한 것이다.’ ‘사태가 바뀌더라도 그와 상관없이 이것은 여전히 타당하다.’ 이런 말씀은 성립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미시론, 그리고 시간의 핵)
그 ‘적절한 때’, ‘진리’의 순간을 ‘갑자기’, ‘불현듯’, ‘느닷없이’ 직관적으로 포착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사유가 시간의 흐름, 역사를 따라잡고 있을 때, ‘진리’의 순간을 파악하기가 수월할 것이고, 동의할만한 보편의 정도도 커진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미시론, 그리고 시간의 핵)
2025. 11. 28.
문장 출처 - 고요히 한 걸음 괄호 안은 글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