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한 걸음

지독한 믿음

by 영진

이론은, 과학은 자신의 유불리, 이익에 앞서 ‘사태 자체’에 충실한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그들의 존재 이유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론가도 인간인지라 자신의 이익과 권력 앞에서 '사태 자체'에 소홀하거나 외면하기도 한다. 과학을 한다면 현실의 진리, 양심의 존엄과 마주해야 하는 것이, 그와 같은 본연의 과학을 하지 못한다면 과학을 그만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론의 숙명일 것이다.(이론의 숙명)



최고의 연주, 최고의 삶은 어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그렇게 불리는 것이 있다면, 사람들이 그렇게 불리고 싶다면 오히려 그런 기준에 꺾이지 않고 스스로의 방식으로 해나가는 연습에 열중할 때 가능할 수 있겠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최고라는 것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는 순간이 찾아올 것이며 그 순간만이 최고라 불릴 수 있겠다.(연습의 의미)



이성은 스스로 만든 규율을 문제 삼지 않을 때 오히려 그 규율 속에 갇히게 된다. 스스로 만든 논리에, 규율에 갇히는 것이야말로 인간들이 자신을 가두는 감옥일 수 있는 것이다. 즉, 한 사회가 감옥과 같다 하더라도 그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들이 그 사회를 문제 삼고 그들이 살아가기에 적합한 사회에 대해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있느냐에 따라 그 사회는 다른 사회로의 변화 가능성에 열려 있다고 할 수 있다.(착각하지마)



‘가난과 버려짐’으로 무너져 가는, 파괴와 분열로 파멸해 가는 인류의 시간 속에서 어딘가 믿는 구석이 있다는 것은 한 줄기 빛과도 같다. 세상의 구석구석에서 믿음의 빛이 발하고 있다는 것은 세상의 구석구석에서 현실에 대한 총체적 인식에 근거한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들이 밝혀주는 믿는 구석이 있다는 것일 테다. 그들의 지독한 믿음으로 인해 견고할 리 없는 세상은 견뎌지고 있는 것일 테다.(그 해 우리는 : 지독한 믿음)



누구나 그러하듯 나 역시 나의 길을 걷고 있을 뿐이다. 그 길 위에서 내가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때론 하고 싶은 일도 하면서. 다만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고 싶지 않지만 누군가에게는 해로울 일도 하면서. 고마운 관심과 함께.(고마운 관심)



사람들은 현재의 상황을 면밀히 파악하기보다 기존에 하던 대로 행동하거나 자신의 의지에 기대어 행동함으로써 자신도 모르게 상황을 지배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아르타바노스는 크세르크세스에게서 그런 모습을 본 것이다. 그럴 경우 대개 상황에 적합한 행동에 실패하게 된다.(지배하지도 지배당하지도)



“주어진 상황”에 온몸을 던지는 판단을 통할 때 자신이 바라는 상황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이 아르타바노스의 지혜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지혜는 상대적으로는 모든 입장이 옳다고 주장함으로써 그중에서 더 적합한 상황 판단과 행동을 못하게 만드는 상대주의로부터 멀리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서 소중해 보인다.(지배하지도 지배당하지도)



내가 바라는 사회의 모습이 현실의 변화에 따라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고 내일 달라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달라진 현실에 맞춰 또다시 물어야 할 것이다. 나는 어떤 사회에서 살고 싶은가. 그 물음이야말로 자신이 바라는 사회의 실현 여부보다 더 의미 있어 보인다.(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



인류의 역사는 늘 그렇지 않았나. 늘 변화하고 있지 않나.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가는 ‘우리’의 몫일 수밖에 없지 않나. 오직 우리의 힘과 분투로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두 가지를 얻게 될 것이다. 쟁취한 그것과 새로운 것을 쟁취할 가능성의 존재인 자기 자신을.(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



2025. 11. 30.




문장 출처 - 웃으며 한 걸음 괄호 안은 글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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