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이라는 게 있냐 없냐. 다 필연이냐. 혼선이 있다. 필연인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모를 때는 우연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개념으로 받아들이면 실제로 우연투성인 거다. 전 세계가 우연으로 넘친다. 우리가 모르는 게 너무 많으니까 우연이 있다고 얘기한다.
필연이라는 말 자체가 구멍이나 이런 게 전혀 없어야 하는데 과연 그게 입증이 됐나. 그걸 다 안다는 거는 신도 아니고 말하기 그렇다. 근데 우연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다시 거꾸로 보면 지나고 보면 사실은 그게 우연이 아닌 거다. 내가 봤을 때는 우연이 아니라 나랑 접점이 있으면 그건 완전히 우연이라고만 볼 수 없는 거다.
근데 우리가 필연이라고 인식해서 확신하게 되는 뭔가 자료를 긁어모아서 이건 필연이었어라고 하더라도 실제로 필연이냐 그냥 몇 가지만 연결해서 필연이라고 자기가 우기는 거냐. 그러니까 사이비 필연 아니냐.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게 필연인지 아니면 앉아 있다 말고 그냥 튀어나갈 수도 있다. 그런 문제에서는 필연이냐 우연이냐 따져야 하느냐 그런 생각이 든다. 그래서 필연이라는 개념을 쉽게 쓰기가 참 어렵다.
그렇지만 필연이라는 거를 규제적 이념으로 전제하고 구체적인 관계들을 끊임없이 우리가 연구하자 하는 자세는 과학적이다.
우리가 그 연관을 아무리 연구해도 빈 공간들을 다 채울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진인사 대천명 한다. 받아들인다. 그러나 존재론적으로 원론적으로 구멍이 있다고 상정하는 것도 그것도 규제적 이념이다.
그리고 그것도 입증이 안 된다. 그것도 일종의 규제적인 이념이고 태도의 문제가 돼버린 거다. 그렇게 상정하고 살아갈래 아니면 필연이라고 보고 그 필연적 연관을 끊임없이 우리가 연구하기 위해서 노력할 거야. 그 차이는 과학적 태도에 있다.
-하영진, '우연과 필연', <도시의 무지개> 236-23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