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을 쓰자 6

by 영진

나는 해방을 쓴다. 인간해방, 자연 해방, 노동해방을 쓰려고 했는데 말들이 많아서 그냥 ‘나의 해방’을 쓰기로 했다, 고 하니 ‘해방의 의미’가 무엇이냐는 질문이 날아든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오늘날의 시대정신이라고 할 수 있을 ‘별일 없음’이나 ‘하루 무탈’이다. 별 탈 없이 하루하루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한 삶, 그것이 해방이 아닌가는 것이다.

정부 관료나 정치인에 대한 ‘소환 제도’로 기억되는 짧았지만 강렬했던 1871년 파리코뮌이 떠오르기도 하고, “‘재벌부터 노숙인까지’ 전인구가 하루에 네 시간만 일하며 정규직인 세상”(정희진)이나 “차이 나는 것들을 서로 존중하고 서로 다른 것들을 사랑하는 것”(아도르노), 사이토 고헤이의 “탈성장 코뮤니즘” 등이 떠오르지만 아도르노의 주장처럼 그들 해방 세상으로 가기 위해선 자본독재가 야기하는 ‘모순의 바다’를 건너야 한다.

바다를 한 번에 건너기는 애초에 힘든 것이지만 지금도 바다를 건너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고 해서 현재의 위치에서 계속 건너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해방의 방식도 다를 수 있겠지만 가능한 힘을 모은다면 모순의 바다를 건너기가 조금 수월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법이나 제도 개선은 권력의 재배치의 다른 표현이지 해방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본독재를 넘어 생산 수단의 소유 방식이나 국가권력의 성격이 민주적으로 바뀔 때 해방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정희진이 주장하는 세상이 당장 가능한 가장 가까이 느껴지는 해방 세상이기도 하다.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해방을 쓰기 위해 나는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ㅣ풍요롭고 평등한 삶


‘답습踏襲’이라는 말은 ‘전부터 해 내려오거나 있던 방식이나 수법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따르는 것'을 말한다. ‘비판적으로 검토하지 않고’라는 의미로 답습이라는 말을 기억해 둘 것이다.

헤로도토스가 ‘역사歷史’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여 역사가 된 history라는 말의 그리스어 어원 historiai에는 ‘탐구探究’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조사해서 배우거나 아는 것’, ‘진리나 학문 따위를 깊이 파고들어 연구하는 것’이 탐구의 의미다.

‘의미’는 부여하기 나름이지만 헤로도토스는 역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조사’하거나 ‘연구’한다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다. 역사 기술記述이 ‘조사’나 ‘연구’ 일 수밖에 없어 보이는 것은 ‘있는 그대로’를 제멋대로 해석하지 않을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 ‘조사’나 ‘연구’ 일 것이기 때문이리라.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네 글자로 말해야 한다면 ‘권력투쟁’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르지만 ‘흥망성쇠興亡盛衰’라고 말하고 싶다. 권력을 둘러싼 음모와 배반과 복수와 전쟁을 끝없이 반복하는 역사를 돌아보며 헤로도토스가 말하는 것이 ‘흥망성쇠’다.

‘흥망성쇠’의 과정에서 ‘권력투쟁’은 필연이었다. 역사에서 ‘권력투쟁’이 필연이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탐구한 결과 역사가 권력투쟁에 따른 흥망성쇠의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지금 ‘쇠’를 말하고 있다. 인류 역사의 현 단계는 자본독점 권력이 성 할 대로 성해 이제 쇠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만일 자본권력이 쇠한다면 그것은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결과여야 한다.

적어도 헤로도토스의 역사적 탐구에 따르면 역사의 과정은 그러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역사 과정을 봤을 때 자본권력과 권력투쟁을 벌여 승리할 세력은 노동계급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권력을 위한 전쟁의 역사가 멈추는 날을 헤로도토스는 말하지 않았다. 아니, 그 누가 말할 수 있을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인 역사를. 결과를 말해주는 과정에 충실할 수밖에 없는 역사를. 과정으로서의 역사는 권력투쟁의 역사이지만, 해방을 위한 투쟁의 역사로도 보인다.

억압적인 권력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역사, 자연과 인류 자신에 대한 앎이라는, 미지未知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역사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이성적이고 지혜로운 인류는 권력투쟁의 전쟁이 멈춘 해방된 공존의 상태를 기획하기도 했을 것이다. 역사에서 권력투쟁이 필연이라면 미지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투쟁은 필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구 밖에서 벌어질 소행성과의 충돌이라는 미지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기후재앙과 독점 자본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풍요롭고 평등한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일이다. ‘풍요롭고 평등한 삶’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지금, 여기‘라는 시공간은 중요해 보인다. 과정이 곧 결과라서, 과거가 담긴 지금이 곧 다가올 미래라서 '지금, 여기'에 충실해야 하는 것일 테다.

'풍요롭고 평등한 삶'은 아주 새로운 가치가 아니다. 이미 역사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 존재했고 존재하는 미래이다. 하지만 과거를 ‘비판적으로 검토하지 않고’ 미래로 답습한다면 어리석은 일이다. 그런 우禹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성공했거나, 실패했거나, 잘못했거나, 어쨌거나 소중한 과거를 답습하지 않는 길은 과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에 대해 ‘깊이 파고들어 연구하는’ 탐구의 자세를 갖는 것이다. 인류 역사의 방향에 미약하나마 영향을 미치기 위한 기본자세로서 말이다.


ㅣ풍요와 평등, 함께 누릴 수 없을까?

드니 아르깡 감독의 영화 <야만적 침략>(원제: Les Invasions Barbares / Invasion Of The Barbarians, 캐나다, 프랑스)은 영화를 보는 내내 이 영화의 제목이 왜 야만적 침략인지 의문을 갖게 만든다. 야만을, 침략을 소리 높여 말하지도, 충격적으로 보여주지도 않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을 중심으로 영화를 이끌어 가는 감독은 두 사람을 지그시 바라보며, 때로는 아버지의 시선으로 아들을 꾸짖고, 때로는 아들의 시선으로 아버지를 비웃는다. 감독 특유의 유머 및 풍자와 함께 시종일관 따듯한 시선을 잃지 않는 태도에서 드니 아르깡 감독의 힘을, 삶과 인간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감독이 말하고 싶었던 야만적 침략은 무엇이었을까?

아들 세바스챤은 아버지가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다는 어머니의 전화에 냉담하다. 어머니 때문에 찾아간 병원에서 만난 그들. 아버지의 병을 확인하기 이전에 그럴 줄 알았다는 식의 반응을 보이는 아들. 아버지 레미 역시 만만치 않다. 누가 오라고 했느냐는 반응이다. 그들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버지의 병으로 인해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와 아들.

함께 행복해야 할 그들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함께가 아니라면 그들 각자의 삶은 행복할까. 아버지의 삶에 비추어볼 때 아들의 삶은, 아들의 삶에 비추어 볼 때 아버지의 삶은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에게 돈 버는 일이 삶의 전부인 아들의 자본주의적인 삶은 한심해 보인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가 야만적 침략의 역사라거나, 9.11 테러의 결과는 미제국주의자들의 자업자득이라고 가르치는 아버지, 자본주의적인 삶에 적대적인 아버지. 자유롭다 못해 방탕하기까지 하며, 돈 버는 일에는 무관심한 아버지의 삶 역시 아들에게 한심해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비록 아버지의 삶을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돈으로 아버지의 마지막 길을 편안하게 해 드리고 싶어 하는 아들의 마음 역시 편치만은 않다. 오직, 일과 돈을 위해서 살아온 그의 삶이 허망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아버지 역시 죽음마저도 돈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삶이, 단란한 가정을 이루어내지 못한 자신의 삶이 서글프기만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슬픈 일은 그들은 함께 행복했어야 할 가족이었다는 사실이 그 행복한 시간이 그들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일 것이다.

영화 <몬트리올 예수>에서 종교적 위선과 물질적인 풍요라는 달콤함에 길들여진 인간들의 부조리함을 유머와 풍자를 통해 꼬집었던 감독의 시선은 <야만적 침략>에서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감독의 따듯한 시선을 잠시 벗어나, 그 부조리함을 부정하면서도 결국 넘어서지 못하고 떠나가는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다가올 아이들에게 어떻게 물질적으로 풍요로우면서도 인간적인 부조리함을 넘어설 수 있는 길을 열어 줄 수 있을지는 아들 세바스찬에게 남겨진 과제일 것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자본주의가 야기하는 병폐들을 넘어선 사회의 모습은 인류가 자본주의 단계에서 이루어놓은 물질적 풍요를 평등하게 누리는 형태여야 할 것이다. 그것은 생산방식이 민주적이고 평등하게 관리되는 사회를 의미할 것이다.

영화에서처럼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의 삶의 방식을 적대시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자본주의의 물질적 풍요를 누리면서 생산방식이 민주적이고 평등하게 관리되는 사회를 함께 이루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2026. 1.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