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해방을 쓴다. 인간해방, 자연 해방, 노동해방을 쓰려고 했는데 말들이 많아서 그냥 ‘나의 해방’을 쓰기로 했다, 고 하니 곧바로 질문이 날아든다. 나? 나가 누군데? 나가 뭔데?
그 집요함이 마음에 들어서 바로 답해 드린다. 나는 너다. 너는 노동자,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민, 아동, 노인, 노숙자, 비서울거주자, 사회적 약자 모두.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해방을 쓰기 위해 나는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ㅣ사회주의와 민주주의
엥겔스는 ‘과학적 사회주의’와 ‘유토피아적 사회주의’를 구분한다. 그렇다고 엥겔스에게 과학적 사회주의와 유토피아적 사회주의가 대립하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초기 사회주의자들이면서 자신들 이전의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비판과 계승의 과정에서 맑스와 엥겔스가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엥겔스는 과학적 사회주의는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에서 파생되지만 후자를 풍부하게 하며 결정적으로 전자는 후자에 대해 우월하다고 한다.
티에리 파코는 그들의 ‘역사 개념이 같지 않기’ 때문에 대화할 수 없다고 하지만 이 글에서 대화를 시도해보려고 한다. ‘과학적 사회주의’와 ‘유토피아적 사회주의’ 중에서 어느 입장이 더 우월한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를 묻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들은 ‘사회주의’로 가는 길에 대한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는데 필자는 그들 양자의 입장을 넘어 ‘사회주의’로 가는 길을 모색하기 위해서다. 그 길에는 민주주의도 놓여있다.
엥겔스가 주장하는 ‘과학적 사회주의’를 불러 낸 것은 ‘필연’이라는 단어 때문이다.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필연적인 역사적 과정을 통해서 사회주의로 이행한다고 했을 때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필연적인 조건과 ‘민주주의’의 연관성에 대해서 묻기 위해서다. 사회주의 혁명의 결과로 다다른 ‘자유로운 인간들의 연합체’는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 있겠는데 사회주의 혁명으로 가는 과정에서, 혁명 이후의 사회주의로의 이행기에서 민주주의는 그 결과인 진정한 민주주의로서 사회주의와 어떤 연관이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과학’과 ‘유토피아’, 양자의 견해대로 ‘역사 이행의 필연적인 과정인 계급투쟁’을 ‘집단의 합의된 행동의 결과’로 만드는 것이 양자가 바라는 사회주의로 가는 길이며 그 길 가운데 ‘민주주의’라는 다리가 있지 않은가라는 물음이다. 혹은 그렇게 튼튼한 다리를 놓아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물음이다.
필자는 엥겔스의 주장대로 ‘미숙한 자본주의의 생산 상태’가 아니게 되면 사회주의 혁명이 필연적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여긴다. 다만, ‘미숙한 자본주의의 생산 상태가 아닌 상태’는 어떤 상태인지는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을 때 입증될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필자의 관심은 지금 여기에서 가능한 사회주의로서의 진정한 민주주의, 즉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와 같은 상태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다. 계급투쟁, 혹은 ‘계급 충돌을 해결할 수단’을 포함해서 지금 여기에서 가능하기에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지배관계의 전복을 위한 움직임에 대한 물음일 것이다.
또한, 필연적으로 도래할 혁명 이후를 위해서 지금 여기에서부터 민주주의를 구현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물음을 가지고 있다. 역사적 사실로 존재했던 러시아 혁명 이후의 소비에트가 진정한 민주주의로서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에까지 이르지 못한 것이 과두제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노동자 스스로 민주주의를 실천할 줄 아는 훈련이 되어 있었다면, 즉 더 많은 노동자들이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사회주의로 이행하기 위한 실천을 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는 물음이 그것이다.
사회주의에까지 어떻게 도달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민주주의는 자본주의 내의 맹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 관계의 응축으로서 사회적 형식’을 바꾸는 것이야말로 혁명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엥겔스의 과학을 따른다면 ‘미숙하지 않은 자본주의적 생산 상태’가 혁명을 야기할 것이다. 또한, ‘미숙한 계급 관계에 상응하여 미숙한 이론’이 나왔다면 미숙한 계급 관계를 바꾸는 것은 미숙하지 않은 계급투쟁과 이론에 의해서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민주주의를 바라는 사회라면 자본권력이 지배적인 사회적 계급 관계의 전복을 요구하며 투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자본권력의 독점이라는 반민주적인 체제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서 가능한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에 내재한 것이 아니다. 최초의 민주주의 역시 인간들의 고안물이었다. ‘미숙하지 않은 자본주의의 생산 상태’와 ‘미숙하지 않은 계급 관계’를 살고 있는 오늘날 고대의 고안물인 민주주의보다 더 민주적인 민주주의를 고안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모든 개인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는 민주주의,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면서도 평등한 사회, 자본권력의 무한독점을 막을 수 있는 정부, 자본주의 내에서 가능한 민주주의의 맹아를 싹 틔워야 하는 것이다. 계급투쟁의 맹아로서 민주주의가 가능해야 할 것이다. 자연과학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고 자연과학의 도움을 받아야 하겠지만 자연과학이 필연적으로 자유와 평등과 인간 존중을 구현하지는 못할 것이다. 사회적 형식을 바꾸려는 인간들의 의식적인 투쟁이 필연적으로 필요할 것이다. 그때 계급투쟁은 민주화하는 민주주의를 사회주의로 넘어가는 교두보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ㅣ충분한 삶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의 입장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본가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이 그렇다는 것이다. 임금을 적게 주고 일은 더 시켜야, 중단없이 대량 생산을 할 수 있어야, 신상품을 생산해내야 이윤을 남길 수 있는 시스템 말이다. 금융 신상품, 주택 신상품, 보험 신상품, 인간 신상품을 생산해내야 유지되는 그런 시스템 말이다.
그러니까, 착한 사장님, 착한 기업인, 착한 자본가는 존재할 수 있지만, 그들의 인성이 착할 수는 있지만, 그들이 노동자들의 임금과 노동환경이라는 문제에서도 착한 경우는 대단히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도 살아 남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노동자들도 자신들의 임금과 노동환경을 착하게 하여 착하게 살기 위해서 자본가들의 입장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자본가와 노동자, 그들은 입장 바꿔 생각하기가 대단히 곤란한 관계인 것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그렇더라도 그 시스템도 운동을 거듭하다 언젠가 변해야 할 때가 오겠지만 당장에 살아야 하겠기에 상생, 공생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럴 경우, 자본가와 노동자만 아니라 ‘정치인, 정부 관료, 법조인, 지식인, 언론인’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도 필요한 것은 착한 인성이 아니라 과학일 것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종합하여 자본가와 노동자가 ‘상생’할 수 있는 다른 시스템을 모색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도 살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일 것이다. 살기 위한 의무인 것이다.
자본가는 노동자의 입장이, 노동자는 자본가의 입장이 될 수 없지만, ‘정치인, 정부 관료, 법조인, 지식인, 언론인’이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자본가와 노동자, 그들 모두가 ‘상생’을 넘어 ‘공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취해야 할 입장은 자본가나 노동자 어느 쪽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스템을 상생의, 공생의 시스템으로 만들어 가는 입장이어야 할 것이다.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보는 착한 입장은 그런 입장일 것이다.
지금껏 늘 하던대로, 노동자 혹은, 민중, 시민, 국민의 고통을 통해서 자본가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그 권력 아래 정치인, 정부 관료, 법조인, 지식인, 언론인이 공조하여 기득권 유지와 각자도생이 보편적인 삶의 방식이 되는 한 상생은커녕 모두의 공멸이 있을 뿐이겠다.
나 역시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에서 내 것 챙기기 바쁜 삶을 살고 있을 뿐이다. 다만, 조금은 다른 삶을 살아보려고 애쓰기도 한다. 그러기 위해서 자본주의 시스템에 의문을 품는 것, 그것으로도 한 인간으로서 충분한 삶이 아닌가 싶다.
ㅣ다를 수 있다
’표현이 좋다‘라는 글에서 썼듯이 6개월의 중남미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그들의 ’표현 문화‘였다. 그 곳을 여행한 누군가에게는 그 곳의 ’표현 문화‘가 좋지 않았을 수도 있다. 혹은 그 곳이 일상인 누군가에게는 좋고 싫을 것 없는 일상일 뿐일 수도 있다.
각자 다른 ’표현 문화‘를 가진 '사회'를 살아가기에 그럴 것이다. 나에게는 좋았다는 것이고, 그 좋음의 이유도 내가 주로 살아 온 ’표현 문화‘와 그 곳의 ’표현 문화‘가 ’달랐기 때문‘일 수 있다. 물론, ’같거나 비슷했기 때문에‘ 좋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표현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거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애정 표현을 한다거나, 지금 이 순간의 감정에 충실하다거나, 이러한 표현 문화는 내가 살아 온 문화와는 다른 것이다. ’다르기‘ 때문에 좋을 수도, 싫을 수도 있다. 옳을 수도 틀릴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생각지도 못한, 경험해보지 못한 다른 것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달라서는 안 돼가 아니라 다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지금과는 다른 것을 가능하게 한다. 더 좋을 수도, 더 나쁠 수도 있지만, 변화의 가능성에 열려 있다는 것이다. 더 좋은 쪽으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2026. 1.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