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해방을 쓴다. 인간해방, 자연 해방, 노동해방을 쓰려고 했는데 말들이 많아서 그냥 ‘나의 해방’을 쓰기로 했다. ‘나의 해방을 자기 방식대로 모두의 해방을 목표로 쓰자’ 이것이 이 글 ‘해방을 쓰자’의 부제다.
뭣이 중헌디, 뭣이 옳은디와 같은 물음 앞에서 자신이 중하고 자신이 옳다고 말하겠다면 검증을 통해 증명을 해야 한다. 왜 자신이 가장 중헌지, 왜 자신이 가장 옳은지 말이다. “지배계급의 사상이 지배적인 사상”(맑스)이라는 말처럼 자본주의의 현실은 자본 권력만이 중하고 옳은 것이기 십상이다.
하지만 과연 자본 권력이 중하고 옳은지도 검증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 검증의 기준은 현실일 수밖에 없다. 뭣이 중헌지, 뭣이 옳은지에 대한 답은 현실에 대한 충실한 인식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해방을 쓰기 위해 나는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ㅣ코뮤니즘
코뮤니즘 communism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 재산 제도를 폐지하고 모든 생산 수단을 사회 전체의 공유로 하여 모든 사람이 계급으로부터 해방되고 누구나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한 만큼 분배받는 사회를 이루고자 하는 이론 및 사상”이다.
코뮤니즘이라는 낱말이 담고 있는 상태는 어디에도 없는 곳, ‘유토피아 Utopia’에 가까워 보인다. 실제로 현실에 그와 같은 상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상태를 바라는 이도 많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소설이나 영화에서 자주 그려지곤 하는 암울한 디스토피아의 상태가 더 현실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코뮤니즘을 논할 때 흔히 언급되는 사람이 맑스와 엥겔스다. 하지만, 그들이 강조했던 것은 ‘이상 사회’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폭로’다. 그들이 쓴 [자본론]이 고전으로 인정받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알고 있다.
맑스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한 만큼 분배받는’ 사회는 ‘높은 단계’의 이상적인 사회라고 봤다. 그는 ‘현재의 상태를 부단히 지양하는 운동’을 강조했다. 그와 같은 이상적인 사회로 가고 싶다면 더더욱 ‘지금, 여기’가 어떠한 상태인지 ‘관념’만 아니라 ‘현실’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그에 기반한 운동을 통해서 더 나은 상태의 사회로 변화해간다는 것이었다.
엥겔스 역시 유토피아주의자들을 비판하며 과학적 사회주의를 강조한다. 엥겔스가 생시몽, 푸리에, 오언과 같은 천재적인 사람 몇몇이 세우려고 했던 유토피아를 비판하는 이유는 과학적이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엥겔스도 맑스처럼 현실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통해서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주의적인 상태로 나아가려 했던 것이다. 체 게바라가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라고 했을 때, ‘불가능한 꿈’은 코뮤니즘과 같은 이상 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그러기 위해서 리얼리스트가 되자고 했듯이,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운동을 통해 변화시켜가는 것을 강조했다고 할 수 있다.
아도르노는 “차이 나는 것들을 서로 존중하고 서로 다른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유토피아이지만 거기까지 가기 위해서는 모순의 바다를 건너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토피아로 가기 위해 그가 강조했던 것도 ‘사태 자체’에 대한 촘촘한 ’미시론적 사유‘였다.
코뮤니즘과 같은 이상 사회가 나쁘다거나 문제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런 사회로 가지 못하는 것이, 애초에 지금보다 나은 이상 사회를 꿈조차 꾸지 않는다는 것이 더 나쁘고 더 문제적으로 보인다. 지금과는 다른 지금 보다 나은 이상 사회를 바라지 않는 이들은 늘 있기 마련이다. ’지금, 여기‘에서 기득 권력을 누리고 있는 지금 이대로가 좋은 이들이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상 사회를 바라는 이들에게 논란이 되는 것은 어떻게 그런 사회로 가느냐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어떤 방식을 선택하든 우선되어야 할 중요한 것은 현실에 대한, 사태 자체에 대한 충실함일 것이다.
ㅣ그랜 토리노
화해, 협력, 상생. 참으로 듣기 좋은 소리이고 생각만 해도 흐뭇해지는 일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떤 사회에서든 누구나 늘 바랐고 바라는 것 같지만 인류사에서 실재가 되었던 적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은 일. 끊이지 않는 대립과 갈등, 싸움, 전쟁까지.
누구나 바라지만 쉽지 않은 건 왜일까? 누구나 바라는 것 처럼 보이지만 진심은 아니라서? 아니면 내가 먼저가 아니라 네가 먼저를 바라는 이기심 때문에? 결국 화해, 협력, 상생은 '누가 먼저'의 문제일까? 아니면 애초에 불가능한/불필요한 일일까?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배우, 아니, 감독의 영화 '그랜 토리노(Gran Torino, 2008)'는 '누가 먼저'라는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영화에 등장하는 노인 월트로 인해 많은 생각을 하게되었다 라고 해야겠다. 노감독의 얼굴에 새겨진 깊은 주름을 따라 깊은 생각에 빠졌다고 해야겠다.
한국전쟁에 참전해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도 살아남은 대가로 훈장을 타기도 한 월트. 전쟁 참전도, 살인도 본인이 원했던 것이 아니었던 듯. 그로 인해 아픔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어 보이는 노인. 삶에 대한 분명한 소신과 원칙이라는 고집이 있어 보이는 노인.
비록 차고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지만 매끈하게 잘 유지된 그랜 토리노 자동차를 떠올리게 하는 노인, 그 자동차를 탐냈던 많은 이들, 아들마저도 제쳐두고 이웃인 테오에게 물려주는 모습까지. 그는 참 건실해 보이는 노인이다.
그런 그가 베트남계 흐몽족의 갈등에 개입하게 된다. 옆집에 사는 성실하고 똑똑해 보이는 슈와 테오 남매가 (그의 표현대로라면) 동네 양아치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게 되고, 자신이 젊은 시절 참여했던 한국전쟁과 같이 타의에 의한 싸움 개입이 아니라 부당하게 괴롭힘을 당하는 이들을 이웃으로서 혹은 동네 어른으로서 자의로 방어에 나서게 된 것이다.
화해, 협력, 상생의 문제가 '누가 먼저' 포기하느냐의 문제라고 한다면 당연히 이미 득을 점하고 있는 기득권자들이 먼저 자신의 득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화해, 협력, 상생을 말하는 기득권자들에게서 자신을 먼저 포기하는 모습보다 화해는 제스처에 불과하고 뒤로 자기 것 챙기기 바쁜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그래서인지 끊임없이 이어질지 모르는, 모두가 희생될 수도 있는 싸움으로부터 자신을 포기함으로써 모두를 살리는 월트의 모습을 보면서 참 '어른'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상대적으로 득을 점하고 있는 위치에 있는 누군가가 진정으로 화해, 협력, 상생을 바란다고 말한다면, 나는 그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먼저 당신을 포기할 수 있는가?
ㅣ내면성
내면內面이라는 것이 본디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비어있던 내면을 채워가는 것이라고도 할 수도 있겠고 채우지 않고 비워두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하겠다. 그리하여 그 비워져 있어야 할 채워질 수 없는 내면을 채우려 할수록 채워졌다 느낄수록 비움에 대한 욕구가 커지는 것도 자연스럽겠다.
내면이 있다는 건 외면이 있다는 것이고 그 둘은 별개일 수 없을 것이다.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성격을 지니는 본능과 욕구는 가변적이고 충만할 수 없기에 늘 공허와 결핍이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공허와 결핍을 넘어서기위해 외면을 채우라는 사회적 요구와 강요를 다스릴 수 있는 것은 내면의 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의 성격에 의해 외면이 규정되고 내면의 성격이 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면의 성격에 따라 사회적 본능과 욕구의 성격이 규정되고 외면은 변화해 갈 것이다. 사회적 본능과 욕구의 성격, 그에 따른 외면의 공허와 결핍의 정도, 그들을 다스릴 내면의 힘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변화해 가는 것이겠다.
공허와 결핍의 개별적인 원인−주어진 환경, 관계의 상처, 꿈의 좌절 등−은 다를 수 있겠지만 늘 충만하게 채워질 수 없는 형태로 존재할 것이다. 사는 동안은 늘 공허나 결핍의 가운데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고, 삶을 공허를 건너는 결핍을 채우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삶의 공허와 결핍을 건너고 채우기 위해 사회활동, 미적 체험, 예술 활동 등으로 내면의 힘을 키워갈 수도 있을 것이다.
2026. 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