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해방을 쓴다. 인간해방, 자연해방, 노동해방을 쓴다, 고 하니 왜 노동해방이 맨 앞에 위치하지 않느냐는 물음부터 여성해방, 장애인해방, 성소수자 해방, 동물 해방은 왜 언급하지 않느냐는 물음까지 다양한 물음들이 제기된다.
원래는 제목을 ‘나의 해방을 쓰자’라고 하려고 했는데 나만의 해방이냐고 또 물으시길래 그게 아니라서 그냥 해방을 쓰자라고 했는데 설명이 필요할 듯싶다. ‘나의 해방을 자기 방식대로 모두의 해방을 목표로 쓰자’ 이것이 ‘해방을 쓰자’의 부제라고 할 수 있다.
역시 문제는 자본주의 구조가 아니라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노동자,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가 단결하지 못하고 서로 갈등하거나 적대적 모순 상태에 있다는 것인가 싶다. 해서, 뭣이 중헌디라는 물음에 ‘나의 해방을 위해서 자본주의를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가 중하다고 답하고 싶다.
함께 살아낸다면 잘하면 덜 힘들 수도 있지 싶다. 분산된 소모임 수준이 아니라 작더라도 단단히 연결되어 조직적으로 자본주의도 분석하고 단결 투쟁도 하고 노동자 정치도 하는 것도 잘하면 도움이 되지 싶다.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해방을 쓰기 위해 나는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ㅣ노동, 소유, 감각
칼 맑스는 [경제철학초고]에서 ‘사적 소유’라는 감각이 인류의 지배적인 감각이 된 근거는 ‘소외된 노동’이라고 밝히고 있다. ‘소외된 노동’이 ‘사적 소유’라는 감각을 탄생시킨 비밀이며 그렇게 탄생한 ‘사적 소유’라는 감각은 ‘소외된 노동’을 통해서만 유지·존속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 둘은 한 몸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외된 노동’은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와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노동자를 전제로 한다.
“(노동자가) ‘자유롭다’는 것은 자유로운 노동자가 자유로운 인격으로서 스스로의 노동력을 스스로의 상품으로서 마음대로 처분한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판매할 다른 상품을 갖고 있지 않고 자기 노동력의 실현에 필요한 모든 물적 조건에서 떨어져 자유롭다는 이중의 의미에서이다.” 자신의 생산수단이었던 토지를 빼앗겨버려 생산수단이 없으니 공장에서 생산수단을 가진 자본가에게 몸을 팔아야만 삶을 유지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어쩔 수 없이 자유로워진’것이다.
약탈과 침략을 통한 자본축척 및 자본의 편에 선 정부와 법, 그러한 것들의 집합체로서의 국가라는 공식을 그대로 따르는 자본주의 사회라면 칼 맑스가 사적 소유 및 소외된 노동의 결과로 묘사한 노동자들의 상태는 과장이나 우연이 아닐 뿐만 아니라 필연적으로까지 보인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을 통해 자신을 긍정이 아니라 부정하며 (…) 노동자는 노동 바깥에서 자신을 느끼며 노동 안에서는 자신의 외부에 있음을 느낀다. 그는 노동을 하지 않을 때에 편안함을 느끼고 노동을 할 때에는 편안하지 않다. 따라서 노동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강제된 강제노동이다. 따라서 노동은 욕구의 충족이 아니라 노동이 아닌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런데 칼 맑스가 지적하고 있듯이 ‘소외된 노동’의 중대한 폐해는 인류의 삶 전체의 파괴, 즉, 노동자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파괴한다는 데에 있다. 자본가와 노동자는 협력적인 관계가 아니라 늘 적대적인 대립관계에 놓이게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동료들은 더 이상 더불어 살아야 할 이웃이 아니라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밟고 올라서야 할 적일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침략과 약탈을 기반으로 완성된 ‘사적 소유-소외된 노동-사적 소유’라는 지속적인 상태는 인류의 감각마저 변화시키게 된다. “모든 신체적 정신적 감각들을 대신하여 이 모든 감각들의 단순한 소외 곧 소유라는 감각”이 생겨난 것이다.
“사적 소유 내부에서 (…) 각자는 타인에게 새로운 욕망을 만들어주는 일을 노리고 투기하며, 이로써 타인을 새로운 제물이 되도록 강요하고, 새로운 예속관계에 빠뜨리며, 새로운 방식의 향유와 아울러 경제적 파멸로 오도한다. 각자는 타인을 지배하는 낯선 본질력을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자신의 이기적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한다. 따라서 대상들의 양이 증가함에 따라 인간이 예속되어 있는 낯선 존재들의 영역도 커지며, 새로운 생산물은 모두 상호기만과 상호약탈의 새로운 잠재력인 것이다. 그럴수록 인간은 인간으로서 더욱 빈곤해지며, 적대적인 존재를 제어하기 위해 더욱더 많은 돈을 필요로 하게 된다. 또한 돈의 힘은 생산의 양에 반비례해 하락한다. 즉 돈의 힘이 증대함에 따라 돈은 더욱더 필요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돈에 대한 욕구는 국민경제학이 생산하는 진정한 욕구이며, 그것이 생산하는 유일한 욕구이다.”
이렇듯 약탈자들에게서 시작된 타인에 대한 약탈과 착취를 통해 자신의 이익을 충족시키려는 ‘사적 소유’라는 감각은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과정에서 소외된 노동을 겪은 노동자들에게도 보편적인 감각이 되기에 이른다. 약탈과 착취를 통해서 가능해진 사적소유라는 감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생각하는 것조차 힘들게 만드는 현실이지만 부단히 반성하는 것도 필요하겠고 그러한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 가능한 행동을 부단히 하는 것도 필요하겠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져다 줄 반성의 시간들이 필요할 텐데 그 시간과 환경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가 관건이겠다.
ㅣ이론의 숙명
여느 여행지에서처럼 멕시코시티에서도 예술가들의 흔적을 찾았고 프리다 칼로가 살았던 집을 방문했다. 멕시코시티에서는 뜻하지 않은 만남들이 많았다. 숙소였던 펜션 아미고가 그랬고, 인류학 박물관이 그랬고, 코요아칸이 그랬다.
코요아칸에는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만 아니라 러시아의 이론가 레온 트로츠키가 망명 중에 살았던 흔적이 보존되어 있었다. 뜻밖의 만남이었다. “이론의, 이론가의 운명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들었던 트로츠키. 권력으로부터 총 맞을지언정 현실에 대해 자신의 분명한 목소리를 내야 하는 것. 그것이 이론의, 이론가의 숙명일까?”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이론가 트로츠키를 만났던 날 나에게 던졌던 물음이다. 인류 역사상 어느 시대, 어느 체제에서나 권력에 의해 탄압 받거나 추방 당하거나 죽임을 당한 이론은 수도 없이 많았다.
이론은, 과학은 자신의 유불리, 이익에 앞서 ‘사태 자체’에 충실한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그들의 존재 이유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론가도 인간인지라 자신의 이익과 권력 앞에서 '사태 자체'에 소홀하거나 외면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처럼 진리와 양심을 저버리는 순간 자신의 존재 근거를 상실하게 되기에 그런 이론은, 과학은 더 이상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양 생명력을 잃게 된다. 해서, 스스로 죽음을 택하거나, 권력을 피해 망명을 하거나, 이론이기를 그만두는 것일 게다.
그러니까, '권력이냐 과학이냐'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 과학을 한다면 현실의 진리, 양심의 존엄과 마주해야 하는 것이, 그와 같은 본연의 과학을 하지 못한다면 과학을 그만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론의 숙명일 것이다.
ㅣ말이라는 씨
나는 글을 읽고 좋은 말을 나누려고 한다. 좋은 말을 애써 지어내려고도 한다. 어휘와 표현을 확장해 보려는 생각에서다. 말이 씨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기도 하다. 좋은 말은 좋은 생각의 씨가 되고 좋은 생각은 좋은 말과 행동의 씨가 될 것이라고, 나쁜 말은 그 반대일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좋은 말이 씨가 되어 현실이 변하기를 바라는 것이기도 하다. 현실적 조건이 그렇지 못한데 말만 좋게 한다고 현실이 달라질 리 없다. 그래도 그렇게 좋게 말함으로써 그럴 여지를 만드는 것이다. ‘현실’은 고정불변의 무엇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생물과 같은 것이기에 말이다. 좋은 말은 나의 소망이 담긴 말인 셈이다. 현실에 근거한 소망 말이다. 듣기 좋으라고 하는 인사말인 것만은 아닌 것이다.
‘비판’이 듣기 좋은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쁜 말은 아니다. 비판이 입에 쓴 약일 수 있는 것이다. 다만, 기왕이면 비판도 듣기 좋게 말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자칫 비판이 비난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상대가 수용할 때 제대로 된 비판일 테니 말이다.
나는 ‘비판’은 ‘자기반성’과 동의어라고 여긴다. 비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은 그러하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자신은 그러하지 않으려면 ‘자기반성’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비판받을 일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비판일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반성이 필요한 사람들은 대체로 권력을 가진 자들이지만 자기반성을 게을리하는 이들이 그들이기도 하다. 그들에 대한 비판은 그들에 동조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기 위해서도 각자의 자기반성은 중요해진다.
좋은 말, 감사의 말, 응원의 말을 애용하는 것은 나의 자기반성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런 말은 나에게 하는 것이기도 하니 말이다. 좋은 말 들을 일, 감사받을 일, 응원받을 일을 하자는 의미도 담겨 있는 것이다. 좋은 말이 좋은 씨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2025. 12.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