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을 쓰자 2

by 영진

나는 해방을 쓴다. 인간해방, 자연 해방, 노동해방을 쓴다. <해방을 쓰자>의 첫 문장이다. 무엇이 우선인가. 뭣이 더 중헌디. 질문이 날아든다. 왜 노동해방이 맨 앞에 위치하지 않는가. 노동해방이 중심이 아닌가. 노동해방 없이 인간해방, 자연 해방이란 말이 성립이 되느냐. 어느 것이 우선이든 서로 무관해 보이지는 않는다.

역시 문제는 노동이다. 먹고 살아야 하니까. 나에게 묻지 말고, 자본독재권력들에게 물으시라. 그들과 결탁한 국가권력, 정치 권력, 언론 미디어 권력, 지식 권력, 노동 권력에게 물으시라. 왜 노동이 중심이 아니냐고, 노동을 존중하지 않느냐고 물으시라.

노동해방을 위해서 그들 권력에 맞서 단결 투쟁도 해야 하고 노동자 정치도 해야겠지만 해방을 쓰는 글쓰기가 쓸데없어 보이지는 않는다. 노동해방을 쓰기 이전에 자기해방부터 쓸 필요도 있어 보인다. 자기 내면의 해방. 자신으로부터, 자신의 탐욕으로부터 해방되지 않는 한 노동해방도 인간해방도 자연 해방도 없다. 자본 권력을 닮아갈 뿐. 권한이 클수록 더욱.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나는 해방을 쓰기 위해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 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ㅣ노동과 자유 그리고 책임


아우슈비츠(Auschwiz) 제1수용소 입구에 걸려 있었다는 간판에 새겨진 ‘ARBEIT MACHT FREI’(노동이 자유롭게 하리라)는 문구에서 눈에 들어 온 것은 알파벳 ‘B’가 거꾸로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간판을 만든 노동자들의 저항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노동이 노동하는 자들을 자유롭게 하리라는 것은 사실이다. 인간은 동일한 행위를 반복하는 여느 동물과 달리 계획하고 실행하고 반추하는 합목적적인 노동을 통해 삶을 영위한다. 우리가 먹을 쌀도, 입을 옷도, 살아갈 집도, 동물적인 반복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그 실천적 노동 안에는 맛과 멋이 있고 과학과 기술이 있다.

그리하여, 인간의 노동은 예술적이기도 하고 과학적이기도 하며 달나라 여행을 꿈꾸게 하다 실제 달나라 여행을 가도록 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전면화 한 사회로 들어서면서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여 화폐를 구매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노동자들에게 노동이 생존을 위한 의식주를 해결해 준다는 점에서 생존의 위협이라는 제약으로부터 자유를 가져다주기도 한다.

하지만, 양질의 일자리는 고사하고 투잡·쓰리잡에 지역·성별·학력 차별에 직장 내 갑질과 괴롭힘에 시달려도 내 집 하나 마련하기 힘든 노동자들에게, 지구 곳곳으로 값싼 노동력으로 팔려다니는 이주노동자들에게, 그들에게 ‘노동이 자유롭게 해주리라’는 언설은 새빨간 거짓으로 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언설이 거짓이라면, 그러한 거짓 현실을 견디며 노동을 해야 하는, 노동하지 못하면 죽임을 당해야 하는 자본권력이 지배하는 아우슈비츠와 같은 현실은 진실이다.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자유를 약탈함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고 있는 지구상의 대부분의 자본독재국가에서는 자본권력에 의해 노동자들의 임금, 노동 시간, 고용과 해고, 목숨까지도 합법적으로 유연하고도 자유롭게 결정된다.

아우슈비츠에서 노동하는 노동자는 노동에 의해 자유롭지 못했다. ‘노동이 자유롭게 하리라’는 문장의 목적어는 노동하는 노동자들을 관리하며 억압하고 착취하다 살해했던 나치(Nazis)였다.



ㅣ윤리적인 실천


대부분의 윤리적인 실천이 그러하듯 ‘겸손, 관용, 절제, 인내’도 말은 쉽지만 실천은 쉽지 않아 보인다. 또한, 남에게 요구하기 이전에 자신부터 실천하는 것이 중한 것이 윤리적인 실천이기도 하다.

그만큼 실천이 어렵기 때문에 솔선수범할 때 미덕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는 것이 윤리적인 실천이기도 하다. 특히,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거나 기득 권력을 가진 강자들이 그러할 때 신뢰와 함께 존경을 받기도 한다.

‘겸손, 관용, 절제, 인내’와 같은 윤리도 다른 윤리와 마찬가지로 상대적이다. 사회적 약자들이 정치 경제적 권력을 가진 사회적 강자들을 상대로 ‘겸손, 관용, 절제, 인내’하는 것은 복종과 비굴의 자기기만적 표현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해서, 자신보다 약자에 대한 ‘겸손, 관용, 절제, 인내’일 때 미덕일 수 있다는 것아다.

‘온유하라’거나 ‘역지사지’하라는 윤리적 실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한 윤리가 자신보다 약자들에게는 기꺼이 실천되어야 하겠지만, 약자들이 사회적 강자들에게 온유하거나 역지사지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회적 지위가 높은 강자들에 대한 ‘책임과 양심’을 비롯한 윤리적 실천에 대한 강력한 사회적인 요구는 민주적이고 평등한 사회를 위한 중요한 사회적 실천일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자기 주변의 일상적인 권력에 대한 윤리적인 실천에 대한 요구를 관철하는 것이 더 중할 것이다. 당장 내가 실천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면서 일상 권력이 거대한 권력의 밑거름이 된다는 점에서 그러할 것이다.



ㅣ인간적 자유의 본질


맑스는 ‘필요의 영역’과 ‘자유의 영역’을 구분했다. ‘필요의 영역’이란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여러 생산·소비 활동의 영역을 가리킨다. 그에 비해 ‘자유의 영역’은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지는 않아도 인간다운 활동을 위해 필요한 영역이다.

맑스는 ‘자유의 영역’을 확대하길 추구했다. ‘자유의 영역’을 확대하는 것이 ‘필요의 영역’을 없앤다는 뜻은 아니다. 인간에게 의식주는 반드시 필요하고 의식주를 위한 생산 활동도 결코 없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자유의 영역’은 ‘필요의 영역 위에서만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이다.

맑스가 추구하는 ‘자유의 영역’은 물질적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에서 시작된다. 집단적이고 문화적인 활동의 영역에야말로 인간적 자유의 본질이 있다고 맑스는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니 ‘자유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무한한 성장만 좇으며 사람들을 장시간 노동과 제한 없는 소비로 떠미는 시스템을 바꾸어야 한다.

설령 총량을 보았을 때 지금보다 생산이 줄어든다고 해도, 전체를 보았을 때는 행복하고, 공정하며, 지속 가능한 사회를 향한 ‘자기 억제’를 자발적으로 해야 한다. 마구잡이로 생산력을 키우는 게 아니라 자제를 하여 ‘필요의 영역’을 축소하면 ‘자유의 영역’이 확대될 것이다.



2025. 12.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