ㅣ해방을 쓴다
나는 해방을 쓴다. 인간해방, 자연 해방, 노동해방을 쓴다.
굳이 내가 해방을 글로 쓰는 이유는 해방을 위해서 독자들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께서 내가 쓰는 해방을 읽고 그렇게 해서는 해방이 안 되고 이렇게 해야 해방이 된다고 알려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독자들께서 해방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해주면 나의 해방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독자들과 함께 해방을 쓰고 싶은 것이다.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촉진
나는 해방을 쓰기 위해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 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덧붙인다면 해방의 주제들이 광범위하다는 사실을 밝혀둔다. 나의 내면의 해방으로부터, 일상의 크고 작은 해방, 멀게는 자본주의 체제로부터의 해방에 이르기까지 나의 해방을 펼쳐갈 것이기에, 해방은 죽는 그 순간까지 쓸 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이렇게 해방을 써서는 당장 해방이 안 될 것 같다고 조급해하지 마시길 바란다.
부디 독자들께서 나의 해방에 적극 동참해 주시기를 바란다. 나, 너, 우리의 해방을 위해서 말이다.
ㅣ해야하고 할 수 있는 것들
오래전 온라인의 어느 공간에서 나의 글쓰기 벗이자 스승이었던 두 분 중 한 분은 ‘온유하라’는 말을 남겨주셨다. 그리고 또 한 분은 ‘자신에게 불리한 게 진실’이라는 말씀을 남겨주셨다. 그처럼 ‘역지사지’의 자세를 가질 수 있다면 진실 여부를 물을 것도, 물어야 할 일도 없을 것 같다고 하셨다.
하지만, 상대방의 처지에서 입장 바꿔 생각한다는 것이 참 아름다워 보이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대단히 어려운 일이고 되려 왜 그래야 하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가자 제노사이드’, ‘트럼프’, ‘극단 정치’라는 단어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듯이 자본과 제국이라는 권력의 폭력이 최고에 이른 오늘날 ‘온유하라’거나 ‘역지사지’하라는 윤리적인 요청은 참으로 무력해 보이기도 한다.
한데, 그럼에도 그럴수록 오히려 그러한 윤리적인 삶의 자세들이 더 생각나는 것은 자본과 제국의 권력을 넘어서기 위한 저들보다 더 강력한 힘이란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일상 속에서 나부터, 내 주변부터 권력의 폭력이 지배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그리하여 전 지구가 온유하며 역지사지할 줄 아는 이들의 권한이 커지게 만드는 것이, 그들이 책임을 다하게 하는 것이 당장에 할 수 있는 일이고 지금 여기에서부터 그러한 힘이 점점 더 확장되는 것이 나를 살리고 이웃을 살리고 지구를 살리는 길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그러한 윤리적인 실천이 나, 너, 우리가 해야하고 할 수 있는 것들 중 하나가 아닌가 싶은 것이다. 이미 지구 곳곳에서 많은 이들이 지구 권력의 성격을 바꾸기 위해 그러한 실천들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소중해 보이는 것이다.
ㅣ아도르노와 이론과 실천
아도르노의 이론도 현실에 존재하는 현실을 읽고 쓰는 여러 이론들 중 하나일 뿐이다. 그의 이론도 다른 모든 이론들처럼 수용되기도 하고 비판받기도 한다.
아도르노는 자신의 이론이 하나의 ‘모델’일 뿐이니 참고만 하라는 말을 한다. 그 말은 자신의 이론을 절대화하지 말라는 경고일 수 있다. 또한, 스스로 모든 이론의 초월적 자리에 위치하지 않겠다는 자기반성적 태도에서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한 이유에서 그의 이론은 '현실의 한 가운데로' 들어갈 것을, ‘사태 자체에 충실할 것’을 강조한다. 그래야만, 현실에 '몰입'하여 '미시론적 사고', '내재비판'을 하면서 현실의 '모순'들과 마주하면서 현실의 한계를 '정면 돌파'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하기 위해 아도르노는 인식과 대상을 동일시하는 동일성 사유, 대상의 위치만 파악할 뿐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는 위상학적 사유, 대상들의 연관을 보지 못하게 분리하는 행정적 사유, 인간을 오직 자본과 권력의 도구로만 보는 도구적 이성을 비판한다.
더 나아가 아도르노는 ‘개념’, ‘본질’ ‘핵심’을 파악했다고 여기는 동일성 사유에 의해 비개념적인 것, 비본질적인 것, 비핵심적인 것으로 밀려나 배제되지 않도록 비동일자를 늘 인식하려 한다.
아도르노는 ‘제1원리’나 ‘근원’과 같은 하나의 유일한 ‘중심’을 비판한다. 그리하여, ‘별자리Konstellation’('짜임관계'-홍승용) 비유를 통해 ‘중심으로부터 동일한 거리에 있는 관계’를 내세우며 ‘서로 다른 것들이 사랑하며 조화를 이루는’ 유토피아를 언급하기도 한다. ‘모순의 바다’를 건너야만 다다를 수 있다는 말도 덧붙인다.
이러한 아도르노의 비판은 철학사의 주요 문제들을 관통하며 넘어서는 것이기도 하고 현실 변혁을 위한 맑스주의나 포스트모던 이론들과도 겹치거나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점에서 최고의 지성이라 불러도 모자랄 것 없어 보인다.
그처럼 완벽해 보일 지경인 아도르노의 이론도 비판을 받는다. 다른 것들은 차치하더라도 맑스주의자들에 의해 비판받는 현실 변혁을 위한 '실천적 전략'이 있느냐는 것은, 오늘의 시대가 그 어느 때보다 변혁적인 실천을 위한 전략들이 요구된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비판일 수도 있다.
변혁적 실천을 위한 전략 부재는 그가 ‘노동자 중심’의 ‘당파성’이나 ‘전형’보다 만인의 ‘진정성’을 중요히 여긴다는 것, 그럼으로써 노동자 조직을 통한 조직적인 실천이 부재하다는 것이다.
나 역시 아도르노에 대한 그러한 비판에 동의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아도르노에게서 변혁적 실천의 전략을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기도 하다. 아도르노에게서 배울 것은 배우면서 노동자들이 조직적인 실천을 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자 중심으로 조직적인 실천을 하면서도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이 배제되지 않도록 그들과 평등한 관계를 이루며 변혁을 해나가는 것이 진정한 변혁이라는 것이 실천적 맑스주의자들이 이론적 아도르노에게서 배울 점이 아닌가 싶다.
l 더 촘촘한 연대가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브란트와 마르쿠스 비센은 글로벌 사우스에서 자원과 에너지를 수탈함으로써 성립되는 선진국의 라이프 스타일을 “제국적 생활양식imperiale Lebensweise”이라고 불렀다. 제국적 생활양식이란 간단히 말해 글로벌 노스Global North의 대량 생산·대량 소비 사회를 가리키는 것이다.(지속29)
“제국적 생활양식은 선진국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풍요로운 생활을 실현해주기 때문에 보통 바람직하고 매력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글로벌 사우스의 사회집단과 지역에서 벌어지는 수탈, 나아가 우리가 누리는 풍요로운 생활의 대가를 글로벌 사우스에 떠넘기는 구조가 존재한다.”(지속29)
독일의 사회학자들이 밝히듯이 문제는 “수탈과 대가의 전가 없이는 제국적 생활양식이 유지될 수 없다는 사실”(지속29)일 것이다. “글로벌 사우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 조건이 악화되는 것은 자본주의의 전제 조건이며, 남북 사이의 지배종속 관계는 예외적 사태가 아니라 ‘평상시 상태’인 것이다.”(지속29)
사회학자 슈테판 레시니히는 대가를 먼 곳으로 전가하여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 선진국 사회의 ‘풍요’를 지키기 위해 불가결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이를 ‘외부화 사회’라고 부르며 비판했다. 선진국은 글로벌 사우스를 희생시키며 ‘풍요’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오늘뿐 아니라 내일도, 미래에도’ 선진국이 이런 특권적 지위를 유지하려 한다고 레세니히는 죄를 묻는다. ‘외부화 사회’는 끊임없이 외부성을 만들어내며 그곳에 온갖 부담을 떠넘기고 있다. 우리 사회는 그렇게 해야 번영할 수 있었던 것이다.”(지속29)
‘제국적 생활양식’은 북반구의 선진국들이 남반구(글로벌 사우스)의 물적 자원을 수탈하고 인적 자원을 착취해 온 제국주의의 역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제국적 생활양식은 오늘날 뉴노멀이 된 기후 악화, 경제위기(빈곤, 실업, 저임금·장시간의 노동력 착취), 전쟁 위협을 낳고도 그 책임을 남반구 인민들에게 전가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와 같은 ‘제국적 생활양식’이 북반구 선진 국가에 국한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북반구의 제국만 아니라 그들에 기생하는 남반구의 자본 권력 및 국가권력, 즉, 남반구든 북반구든 기득 권력자들의 생활양식으로 보이는 것이다.
또한, 오늘날의 ‘기후, 경제, 전쟁’의 위기에서 북반구 선진국들도 예외일 수 없지만, 여전히 그들 위기로 인해 더 큰 고통과 피해를 겪고 있는 것은 남반구의 약소국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위기가 심화할수록 자신들도 살아 남아야 하기에 약소국민들에 대한 수탈과 착취는 더 심화할 것이다.
저들 기득 권력들의 제국적 생활양식에 변화를 꾀하기 위해서, 위기를 넘어 다른 사회로 변하기 위해서, 전 지구의 노동자계급, 세계시민, 민중들이 저들과는 다른 생활양식을 일상에 뿌리내려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더 촘촘한 연대가 더 단단한 결속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2025. 10.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