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을 쓰자 48

by 영진

나는 해방을 쓴다. '김광석 길'을 걸으며 김광석의 길을 떠올린다. ‘소극장 1000회 공연’과 ‘관객이 한 사람만 있어도 노래한다’는 그의 말이 떠오른다. 무엇이든 1000회를 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대단히 의미 있는 길이라는 생각에 이른다. 무엇이 그런 길을 가게 한 것일까. 새삼스럽게 떠오른 물음 앞에서 돌아오는 대답은 새로울 게 없다. 자신이 좋아하고 애정하는 일이라면 1000회도 가능하지 않겠냐는 것, 그것이 무엇이든 1000회를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누가 뭐라든 말든 누가 봐주든 말든 자신이 할 수 있는 그 무엇을 1000회를 하다 보면 그것이 자신의 길이 될 수도 있겠다는 것이었다. ‘나의 노래는 나의 삶’이라는 그의 노랫말처럼 그렇게 노래하게 되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방을 쓸 수도 있겠다.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해방을 쓰기 위해 나는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ㅣ서른 즈음에


음악도 사람이 만든다는 사실은 음악을 듣는 것은 그 사람을 듣는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창작의 결과인 그 사람의 음악에는 그 사람의 노동과 정신, 그 사람의 삶이 녹아 들어가 있을 수밖에 없겠다.

음악이, 예술이, 삶의 드러남이라는 사실에서 그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기도 하겠다. 어떤 사람이기에 어떤 삶을 살았기에 무엇을 보고 듣고 느끼며 살았기에 그와 같은 창작이 가능했을까. 삶이 궁금해지는 것이다.

그 사람의 삶과 무관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예술은 삶의 결과이기도 하고 삶이 예술이기도 한 것이겠다. 어떤 예술이든, 어떤 삶이든 그럴 것이다.

김광석의 예술적인 삶을 ‘소극장 1,000회 공연’과 ‘할리데이비슨 타고 세계일주’에서 읽는다. 그의 삶을 ‘자유로움’에 대한 ‘살아 있음’에 대한 갈망으로 읽는다. 그런 사실에서 모든 사람은 예술적인 삶을 갈망한다고 여긴다.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은 살고 있다는 것은 자유로움이 드러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 드러남이 어떤 예술, 어떤 삶이 될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겠다.

단 한 사람의 관객만 있어도 그가 할 수 있는 한 공연을 하겠다던 그에게 천 번의 소극장 공연은, 그가 노래할 수 있다는 것은 그가 살아있음이, 자유로움이 드러나는 것이었겠다.

‘나의 노래’의 노랫말처럼 ‘아무도 뵈지 않는 암흑 속에서 조그만 읊조림은 커다란 빛’인 것이었겠다. 해서, ‘마지막 한 방울의 물이 있는 한’ ‘마시고 노래 하겠다’는 것이었을 게다. 그의 노래에 모두 귀 기울여 그의 노래가 멀리멀리 날아가기를 갈망했을 것이다.

‘나의 노래는 나의 삶’이라고 노래하며 소극장에서 쉼 없이 노래하며 자유롭게 살아있는 듯 보였던 그도 자신의 노래, 자신의 삶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것일까.


작기만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비어가는 내 가슴 속엔 더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네 (김광석, ‘서른 즈음에’)

그 즈음에 그는 그의 예술을, 삶을 다한 것일까. ‘서른 즈음에’ 그는 떠났다.

내가 떠나 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 온 것도 아닌데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김광석, ‘서른 즈음에’)


그렇게 그와 이별했다. 지금 그는 할리데이비슨에 기타를 싣고 세계 일주를 하고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지금도 어디선가 노래하고 있을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ㅣ그건 너의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때문이야


광석 형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어디를 여행하고 있을까. 어디에선가 노래를 부르고 있겠지. 지금 이 시대의 우리를 위한 노래를 말이지.


가볍게 산다는 건 결국은 스스로를 얽어매고

세상이 외면해도 나는 어차피 살아 살아 있는걸

일어나 일어나 다시 한번 해보는 거야

일어나 일어나 봄의 새싹들처럼

(김광석, ‘일어나’ 중에서)


일어나~ 일어나~ 하면서 다 같이 일어나서 부르기도 했더랬지. 봄의 새싹들처럼 말이지.


이 계절의 매서운 겨울바람에 생각나는 광석 형의 노래는 이 노래야.노랫말 때문이라기 보다 역시나 형의 까랑까랑한 목소리 때문이겠지. 매서운 추위와 깜깜한 어둠 속을 걸어 나가게 하는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겨울 공기처럼 시원한 힘의 목소리 말이지.


난 항상 어떤 초조함이 내 곁에 있음을 느껴

친구들과 나누던 그 뜻 없는 웃음에도

그 어색하게 터뜨린 허한 웃음은 오래 남아

이렇게 늦은 밤에도 내 귀에 아련한데

그건 너의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때문이야

그건 너의 마음이 병들어 있는 까닭이야

(김광석, ‘그건 너의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때문이야’ 중에서)


수년 전 쿠바 아바나의 호아끼니 까사의 방명록에 형도 알만한 분들이 며칠 전 다녀 간 흔적이 그 곳에 남아 있어서 너무 반가웠던 기억이 있어. 형 생각도 나고 혹여나 다른 도시에서 노래하며 그림 그리며 여행하는 그들을 만날 수 있다면 하고 잠시 설레기도 했었지.



ㅣ살게 하는


정태춘, 김광석, 안치환을 동시대에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삶에서 행운이 아니었던가 싶다. 동시대의 하나의 현실을 살았던 그들이 노래했던 것은 하나였을까. 현실은 하나였지만 그들이 드러낸 현실과 드러내는 방식은 달랐다. 하나의 현실이지만 그들은 다른 삶을 산 것이다. 무엇을 드러내야 하며 어떻게 드러내야 할까. 현실에 대한 그들의 받아들임이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차이는 있겠지만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야 한다면 말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노래하는 현실과 방식은 달라 보였다.

하나의 현실이지만 그 현실을 그들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여긴다. 하나의 현실을 살아낸 그들의 삶을 노래한 것이다. 그들이 보고 듣고 느낀 현실을 노래한 것이다.

그들의 노래, 음악, 예술은 나에게, 너에게, 우리에게 무엇이었을까. 현실에 대한 자각일 수도 있고, 저항일 수도 있고, 위안일 수도 있고, 즐거움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다른 무엇이든 그들의 음악과 함께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도 우리에게도 소중한 기억으로, 삶의 흔적으로 남은 것이다.

하나의 현실을 다르게 사는 우리들이 함께할 수 있었다는 사실, 여전히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그들의 음악이, 예술이 가진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이 아닌가 싶다.




2026. 3.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