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을 쓰자 47

by 영진

나는 해방을 쓴다. 해방은 ’승부를 통해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규정해 본다. 만물은 변한다는 변화하지 않는 만물은 없다는 점에서 변화는 자연스럽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변화라는 것이 이전과 다른 것, 달라진 것을 의미한다면 이전과 다르게 만드는 변화의 요인은 무엇인가 물을 수 있다. 그 요인들 중에는 양의 축적도 있을 것이다. ’전쟁, 재난, 빈곤‘이라는 인간 세계는 변하고 있는가. 전쟁이 재난이 빈곤이 얼마나 축적되어야, 전쟁, 재난, 빈곤을 허용하지 않는 다른 세계가 도래할까. 혹은 무엇이 축적되어야 다른 세계가 도래할까. 그것들과의 승부 한가운데에 머물며 싸우며 견디며 즐기며 변화를 통과하는 수밖에 없겠다.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해방을 쓰기 위해 나는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ㅣ승부를 즐겨라!?


각본 없는 드라마. 스포츠는 살아있다. 스포츠의 세계를 그렇게 부른다. 승부가 있는 곳이라면 그렇지 않을까. 사람들은 살면서 가끔 드라마를 쓴다. 살아 있기에 각본대로 안 되는 바람에 쓰게 되는 드라마를 말이다. 스포츠라면 모를까 사는 것 자체가 죽음과의 지난한 투쟁이라고 여기는 이들에게 승부라는 표현은 말랑말랑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누군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가 아니겠냐마는 살아 보겠다면 살면서 뭐라도 이뤄 보겠다면 피 말리는 승부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피할 수도 초월할 수도 즐길 수만도 없어 보이는 냉혹한 승부의 스포츠의 세계는 우리의 삶이기도 한 것이다. 승부에 관한 흔한 이야기들 속에서 나의 오랜 관심은 ‘승부를 즐겨라’는 말의 의미다.

테니스 세계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 <보리 VS맥켄로(Borg/McEnroe)>를 보면서, 윔블던 대회 5연패를 노리던 비외른 보리와 그의 아성에 도전하던 신예 존 매켄로의 승부를 보면서 ‘승부’에 대해 다시 물었다. 그들에게 ‘승부’는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승부를 즐겼을까. 즐긴다는 것은 무엇일까.

코트에서 판정에 대해 강한 불만을 터트리며 매 경기 말썽을 일으키는 악동 이미지의 매켄로, 진지하다 못해 엄숙하고도 고독하게 승부를 대하는 구도자 이미지의 보리. 두 사람의 이미지가 너무나 상반된 것이어서 그 자체로도 흥밋거리였다. 그 이미지는 그들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 승부에 대한 그들의 강한 애착에서 생겨났음을 알 수 있다. 승리하고 싶은 것이고 이기려고 애쓰다 보니 자연스레 형성된 모습일 것이다.

아버지의 곱셈 문제를 푸는 일은 어린 매켄로에게 즐거움이었을 것이다. 어려운 문제를 풀었을 때의 성취감, 아버지와 아버지 지인들로부터의 인정은 명석한 아들을 둔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만들어주는 것이기에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만큼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부담감 또한 컸을 것이다. 불같이 폭발하는 그의 감정은 승리해서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아야 한다는 강한 인정욕구에서 생겼을 것이다.

보리는 어릴 적부터 자기 자신과 싸웠다. 상대와의 승부에 대한 승리는 자신을 이긴 것에 대한 대가일 뿐이다. 병적으로 보일만큼 철저하게 자기 관리를 하는 보리는 그 누구의 인정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인정, 즉 자기만족을 위해 승부한다고 할 수 있다. 필요하다면 코치도 해고할 만큼 자신에 의한 자신을 위한 승부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나로 인해 승리하거나 패배할 뿐 자신의 승부에 누군가 개입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테니스 역사상 세기의 대결로 화제를 모은, 마치 누군가 설정한 것처럼 상반되는 이미지의 두 사람의 승부에서 승자는 누구였을까. 경기 결과만 놓고 본다면, 첫 번째 승부에서 보리가 5연패를 달성했고 두 번째 승부에서 맥켄로가 보리의 6연패를 저지했으니 1:1 무승부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보리는 은퇴했으니 더 이상 그들의 승부는 이뤄지지 않았다.

그들은 승부를 즐겼을까. 두 사람의 승부는 준비 과정에서부터 경기가 끝날 때까지 마치 목숨을 건 사투와 같았다. 어디에서 즐거움을 말할 수 있을지 모를 정도로 치열했다. 다만, 즐긴다는 것이 승패를 떠나 승패로부터 자유롭거나 초연해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승패를 떠나거나 말거나 승부의 과정에 치열하게 몰입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런 의미에서라면 두 사람은 승부를 즐겼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들 중 누구도 패하지 않은 모두가 승자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승리의 기쁨이나 패배의 굴욕에 지배당하지 않은’ 자신의 삶을 그들은 즐긴 것이다.



ㅣ몰락


1945년 4월 독일 베를린을 배경으로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제국의 최후를 다룬 영화 '몰락-히틀러와 제3제국의 종말'(Der Untergang / The Downfall·독일·2004).

2004년 가을 독일 개봉 당시 독일은 물론이고 프랑스와 영국 및 전 세계인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으며 논란을 일으킨 영화다. 논란의 이유는 히틀러에 대한 대다수 영화들이 그를 전쟁광이나 미치광이로만 보여주는 데 반해 영화 ‘몰락’은 히틀러의 인간적인 면모를 집중 부각시켰기 때문이다.

중학교 때부터 나치역사에 대해 비판적으로 교육하며 과거사 청산 문제에 대해 엄격하기로 알려진 독일에서의 반향은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네오나치즘과 역사 왜곡, 영화가 가져올 파급효과를 우려하는 목소리에 대해 <장미의 이름>, <특전 U보트>의 제작자이자 이 영화의 제작과 시나리오를 쓴 베언트 아이힝거는 히틀러의 이면을 보여줌으로써 오히려 전형적인 폭로에 기여할 수 있다고 밝힌다. 이런 논란에 힘입어 영화는 흥행에 성공하였고 아카데미영화제에도 초청되는 성과까지 올린다.


ㅣ히틀러 정권의 최후와 그의 권총자살까지 12일간의 회고


1945년 4월 베를린이 소련군에 의해 함락되고 거리에는 게릴라전이 한창이다. 영화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지하 벙커로 피신한 히틀러와 나치 지도자들의 행적, 그리고 히틀러 정권의 최후와 그의 권총 자살이 있기까지 12일간의 일들을 여비서 트라우들 융에의 회고와 함께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영화는 장장 두 시간여 동안 유대인 학살의 기획자, 전쟁광, 나치 원흉으로 알려진 히틀러가 아닌 인간 히틀러, 그리고 히틀러에 의해 자만과 폭력, 절대복종과 권력에 길들여진 나치 지도자들이 얼마나 미쳐있었는지 그들 집단광기의 현장을 영화 곳곳에서 보여주고 있다.

영화에서 인간 히틀러는 수전증이 있는 노쇠한 늙은이, 공포에 떨기도 하고 측근들과 농담을 즐기며 자신의 약점을 숨기려 애쓰는 인간, 부인 에바와 여비서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작은 보답에 감격해하거나 눈물짓는 인간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종말로 치닫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들의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며 지하 벙커에서 술과 권력에 취해있는 나치 지도자들. 자신의 아이들에게 독약을 먹여 죽이는 선전부 장관 괴벨스와 그의 부인, 패배 앞에서 히틀러 만세를 외치며 자살하는 군인들을 만날 수 있다.

영화는 히틀러를 짝사랑했던 여비서 트라우들 융에의 회고로 시작해서 그녀의 회고와 함께 끝난다. 그녀는 영화 마지막에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단지 호기심으로 히틀러의 개인비서를 자원했고, 전쟁이 끝난 후 전쟁범죄인을 처벌하기 위해 독일의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재판을 보면서도 이 거대한 범죄와 자신의 과거를 연관 짓지 않았다. 그 범죄에 개인적인 범죄는 없었다고 자신을 안심시키며.

하지만 어느 날 길을 지나던 중 소피 숄이라는 여인의 기념비를 보게 되고 자신이 히틀러 편에 섰던 그 해에 여인이 처형당했음을 알고 깨닫게 됐다고. 젊음은 변명이 되지 않는다는 것. 진실을 찾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ㅣ집단광기의 중심인 '히틀러'는 어디에?... 국가주의를 경계하라


제작자 베언트 아이힝거의 말처럼 영화에서 보이는 히틀러는 미치광이가 아니라 불쌍하고 초라해 보이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런 평범한 인간인 그가 야수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권력을 가진 누가 언제 그런 야수로 돌변하게 될지 모른다는 경각심을 갖게 해주었다.

누구나 히틀러와 같은 야수가 될 수 있으며 나치 지도자들처럼 권력에 의해 파괴와 파멸로 치닫는 집단광기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것이 제작자의 의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비판했듯이 위험한 의도였을 수 있다.

나의 경우에는 권력과 절대복종에 길들여진 나치 지도자들의 집단광기가 파멸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확인할 수 있었지만 그 광기의 중심에는 히틀러가 있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제작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상당히 유감스러웠다.



ㅣ이매진


천국이 없다고 상상해봐요

우리 아래엔 지옥이 없어요.

우리 위엔 오직 하늘일 뿐이예요


나라가 없다고 상상해봐요

죽이거나 죽을 이유가 없어요

종교도 없다고요


소유물이 없다고 상상해봐요

탐욕이나 굶주림이 필요없어요

인류애만 가득하죠


나를 꿈꾸는 사람이라고 말할지도요

하지만 제가 유일한 사람이 아니예요

언젠가 당신도 우리와 함께하길 바래요

세상은 하나로 살거예요

(존 레논, '이매진' 중 일부)


1970년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전 세계의 시위 현장에서 울려 퍼졌다던 존 레논의 ‘이매진 imagine’. 베트남 전쟁은 끝났지만 그 이후로도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국가, 종교, 소유물, 탐욕, 굶주림’이 없는, ‘평화, 인류애, 나눔’으로 ‘하나되는 세상’을 상상해 보라고 존레논은 노래한다. 존 레논은 자신을 ‘꿈꾸는 사람 dreamer’이라고 쓰고 있다.

존 레논은 자신이 상상하는 세상을 꿈꾸는 사람이 자신만이 아니라고, 사람들과 함께하길 소망한다고 노래한다. 그리하여 세상은 하나로 살거라고 노래한다.

존 레논의 노래는 1960년대 말 미국의 청년들을 중심으로 등장했다는 ‘히피 hippie’문화를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그 이후로 그와 같은 문화에 기반한 공동체들이 지구 곳곳에 존재한다고 알고 있다.

그와 같은 공동체들은 존 레논 이전에도 ‘유토피아’라는 이름으로 꿈꾸어졌고, 거슬러 올라가보면 여러 이름의 ‘공동체’들이 실재하기도 했다. 존 레논이 노래하는 ‘국가, 종교, 소유물, 탐욕, 굶주림’이 없는, ‘평화, 인류애, 나눔’으로 하나되는 그런 세상말이다.

‘한 사람이 꾸는 꿈은 꿈일 뿐이지만, 여럿이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는 말처럼 그렇게 존 레논이 꿈을 꾸고 그가 노래한 것처럼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런 공동체는 지금 존재하고 있듯 앞으로도 더 많이 생겨날 수 있을 것이다.

존 레논은 많은 사람들이 전쟁 반대를 외침으로써 전쟁을 억제했듯이, 많은 사람들이 함께 꿈을 꿈으로써 꿈이 현실이 될 수 있다고 노래하는 것이다.

1960대를 살았던 아도르노는 존 레논이 상상하는 것과 닮은 '유토피아'를 ‘짜임관계’(konstellation)라는 비유를 들어 제시한다. ‘위계적 관계가 아니라’, ‘중심과 같은 거리’에있는, ‘반성적 사고의 힘, 정확성의 힘으로 충만해’있는, ‘다른 것과 똑같은 책임’을 지는, '하나의 진리만이 존재‘하는 그런 세상이었다.

아도르노는 그와 같은 유토피아로 가기 위해 현재하는 ‘모순의 바다’, 즉, 존 레논이 노래하는 ‘국가, 종교, 소유물, 탐욕, 굶주림’과 연관된 ‘모순된 현실’을 건너야만 그런 유토피아에 이를 수 있다고 쓰고 있다. 그리고 그 전략으로 현실에 대한 ‘촘촘한 미시론적 사고와 내재 비판’을 통해 현실의 한계를 드러내는 ‘변증법 사유’를 제시한다.

맑스와 엥겔스, 레닌은 ‘파리코뮌’과 같은 ‘정치체’나 ‘각자 능력껏 일하고, 필요한 만큼 갖는’ 이상사회에 대한 가능성을 찾았다. 한편으로는, 존 레논이 노래했던 것과 같은 공동체들이 인류 역사에 실재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사회의 운동 과정을 촘촘히 분석하는 것이었다.

레닌은 국가를 통해 이상사회를 실현하려 하기도 했다. 체 게바라의 후예들은 지금도 자신의 국가를 이상사회로 변모시키기 위해 분투하고 있기도 하다. 유럽의 노동자, 시민들은 복지국가를 일구어 왔다.

존 레논, 아도르노, 맑스, 엥겔스, 레닌, 체 게바라가 꿈꾸었던 이상사회는 현재 지구 곳곳에 ‘부분적으로나마’ 실현되었다고, 꿈은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고, 우리 모두가 아닌 지극히 ‘일부의 삶’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국가, 종교, 소유물, 탐욕, 굶주림’의 세상이 ‘평화, 인류애, 나눔’으로 ‘하나되는 세상’으로 가기위해선 그들만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도 소중해 보이고, 그들과 함께 상상하고 꿈꾸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도 소중해 보이고, 현실에 대한 분석적이고 종합적인 사유에 기반한 전략적 사고, 그에 따른 우리 모두의 요구도 소중해 보인다.




2026. 3.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