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을 쓰자 46

by 영진

나는 해방을 쓴다. <해방을 쓰자>에서 몇 차례 언급했던 “‘재벌부터 노숙인까지’ 전인구가 하루에 네 시간만 일하며 정규직인 세상”이라는 명문장을 남겨준 정희진 학자가 최근에 또 하나의 문장을 남겨주었다. “여성의날 하루를 제외한 나머지 날이 남성의날이다” 이 문장의 앞 에는 다음의 두 문장이 있다. “매년 3월8일은 1975년 유엔이 지정한 ‘세계여성의날’이다” “역사적으로 의미 깊은 날이지만, (유엔이 공식 지정한) ‘남성의날’은 없다” 그리고 위 문장의 뒤 두 문장은 이렇다. “ ‘이성애자의날’ ‘비장애인의날’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여성의날을 여성 우위 사회의 증거라고 주장하는 것은 성차별을 젠더 갈등으로 왜곡시키는 또 다른 차별이다” 맨 마지막 문장이 눈길을 끈다. 정희진 학자의 글에서 꽤 자주 만날 수 있는 유형의 문장이다. 여성 차별은 여전하다는 것이다.

<해방을 쓰자>에서 정희진 학자를 언급하는 이유는 여성의날이 다가와서는 아니다. 정희진 학자의 문장들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문장들을 비롯해 그의 문장들과 십수 년의 시간을 함께해 온 것 같다. 정희진 학자의 문장들을 처음 만난 건 <페미니즘의 도전>이라는 책에서였다. 그 이후 그의 문장들이 그가 연구자로서, 사회 운동가로서, 학자로서 치열한 삶 속에서 길어 올린 문장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의 문장들을 더욱 가까이하면서 살아온 것 같다. 그의 문장들에 모두 동의하는 것도 아니고 처음에는 그가 바라는 것처럼 남성으로서 꽤 불편했다. 지금도 불편한 문장들도 있지만 그럼에도 대부분 동의할 수 있는 문장들이고 공부하는 마음으로 그의 문장들을 옮겨 적어두었다가 필요를 느낄 때마다 다시 읽는다. <페미니즘의 도전> 이후에 <정희진처럼 읽기> <낯선 시선> <혼자서 본 영화> 글쓰기 관련 책들의 문장들이 그러하다.

정희진 학자의 책을 비롯해서 여성주의와 관련한 책들을 읽고 관심을 두었지만 여성주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기에 달리 할 말은 없다. 그래도 여성주의를 만나기 이전에 경험했던 가족의 여성 구성원들을 비롯해 주변의 여성들이 겪었던 여성 차별에 대해서, 특히, 내가 10대의 사춘기 때 겪었던 일들은 충격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 이야기들을 나의 책들에 남기기도 했다. 이 지면에서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으려 한다. 여성주의를 만난 이후 기억에 남아 있는 일들도 있지만 그 역시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나는 단지 남성이라는 이유로 단지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겪어야 하는 차별과 불평등을 겪지 않으며 살고 있다. 그리고 나는 단지 자본 권력, 국가 권력, 정치 권력, 사법 권력, 언론 미디어 권력, 지식 권력이 아니라는 이유로 차별과 불평등을 겪으며 살고 있다.

정희진 여성학자이자 평화학자의 문장들을 남기며 <해방을 쓰자 46>을 맺는다.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해방을 쓰기 위해 나는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ㅣ정희진처럼 읽기


권력 관계가 지배자의 성찰로 뒤바뀌는 경우는

없다. 이것은 모든 권력 관계에 해당한다.

인간은 요구나 투쟁이 아니라 상대방이 기존과는

다른 반작용(re/action)을 행사할 때 변화한다.

구조는 개인에게 미치는 작용이고 그 구조에 대한

개인의 행위성을 반작용이라고 할 때, 구조에

편승한 이들의 변화는 약자의 예상치 못한 행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들’이 기대하는 익숙한 패턴을

파괴하는 것이다.[정희진처럼 읽기, 91]


남을 억압하는 사람은 자신을 해방시킬 수 없다.

[정희진처럼 읽기,134]


간혹 매우 총명한 이들과 조우한다.

나는 그들의 ‘비법’을 알고 있다.

이해는 영혼이 순수한 사람의 특권이다.

대상에 대한 사랑, 이해하고 싶어서 기득권을

포기하는 데 망설임이 없다.

자신을 보수(保守)하지 않는다.

[정희진처럼 읽기, 284]


연습은 정신력으로 몸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연습된 몸으로 정신(적 실수)을 ‘없애는’ 방식이다.

연습, 연습, 연습, 그런 경지의 노력은

명예와 금전적 보상만으로 불가능하다.

삶을 사랑하지 않으면 해낼 수 없다.

[정희진처럼 읽기, 292]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노동하고 존재하고

일상을 사는 사람은 글을 쓰지 않거나,

쓸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쓰더라도 자기 이야기를 그 반대 입장에서

생각하고 서술하는 사례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특별히 의식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세상을 발견하는 것도,

그러한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도 어렵다.

[정희진처럼 읽기, 298]



ㅣ낯선 시선


원래 잉여(surplus)는 남는 장사, 이익을 의미했다.

그런데 지금은 사람이 잉여가 되었다.

없어도 되는 사람(useless). 전 세계적으로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 같은 대안을 절박하게 찾고 있다.

노동 운동은 정규직을 외치고 있다.

나는 두 세력 모두에게 좌절한다. 자본의 의지와

무관하게 시스템은 정규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정규직 개념부터 바꿔야 한다. ‘재벌부터 노숙인 까지’

전 인구가 하루에 네 시간만 일하며 정규직인

세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24시간 일하는

글로벌 비즈니스맨을 제외한 절대 다수는

‘100세 시대’에 30대부터 잉여로 살아야 할 판이다.

아니, 이미 그런 시대다. 캥거루에게 미안할

지경이다. ‘캥거루족’은 그나마 중산층 부모를 둔

잉여들이다.[정희진, 낯선 시선, 51]


대부분의 인간이 잉여이거나 잉여 직전인 사회에서,

우리는 잉여의 공포에 떨면서도 먼저 잉여가 된

이들에게 안도감과 경멸을 느낀다. 심지어 오로지

잉여를 제거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는 비극도 있다.

남아시아의 몇몇 부족들은 식량 부족과 인구의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인위적 전쟁으로 인구를

‘조절’한다. 이렇게 보면, 저출산은 다행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인구를 국력으로 생각하는

국가주의, 남성 생식력 숭배 문화, 고령자에 대한

편견이 저출산을 문제로 만들었다.

[정희진, 낯선 시선, 51]


종말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사태는

인간이 원해서 인간이 만든 것이므로

변화 역시 인간의 의지로 가능하다. 새 역사

창조는 ‘세계로 뻗어 나가는 대한민국‘이

아니라 ‘지금, 여기’ 있는 이들을 존중하는

것이다. 국민이 잉여가 아닐 때는 선거 때?

‘댓글 아르바이트‘를 보면 그마저도 아닌 것 같다.

[정희진, 낯선 시선, 52]


전쟁 불감증의 가장 큰 원인은 ‘먹고사는 게

전쟁’이기 때문이다. 매일 매일이 전투,

이전투구(泥田鬪狗)의 삶이다.

전쟁이 없어도 입시, 실업, 질병, 외로움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살로 목숨을

‘빼앗기고’ 있다. 구타, 모욕, 불편, 고통이

일상인 여성과 장애인, 아픈 사람,

가난한 사람에겐 ‘지금, 여기’가 바로

전쟁터다. 사회적 약자의 일상이 아니더라도

어떤 이에겐 ‘북핵보다 엔화 약세가 더 심각’

하고 ‘전쟁보다 빚이 더 무섭다’.

[정희진, 낯선 시선, 55]


쟁점은 전쟁 불감증 여부가 아니다. 불감이든

민감이든 그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문제의 본질은 위기의식과 경각심을 가져야 할

사안과 ‘가벼운’ 사안이 있다면 그것을 누가

정하는가이다. 국민들이 절실하게 느끼는 현안에

대한 집권 세력의 무감각, 이것이 진짜 전쟁,

즉 내부의 전쟁을 만들어낸다. 무감한 정도가

아니라 국민들의 절박함과 두려움을 부정하고

공권력을 행사할 때 전쟁이 시작된다. 한국은

고위 공직자 비리에 둔감한 정도가 아니라

너그러운 사회다. 표절, 병역 비리, 탈세,

부동산 투기, 위장 전입, 학력 위조 따위가

‘종합 세트’가 아니라 한두 건만 해당하면

‘청렴한 편’이라는 여론이 나온다.

[정희진, 낯선 시선, 55]


국가 간 전쟁 연습, 군사적 긴장 고조의

목적은 전쟁이 아니라 내부 통치 전략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를 모르는 국민은 없다.

전쟁 불감증이 당연한 이유는 두 가지다.

승부도 출구도 없는 공멸의 현대전,

그리고 당장 일상의 삶이 ‘더’ 다급하기 때문이다.

[정희진, 낯선 시선, 56]


혐오는 특정 대상을 싫어하는데, 그 이유가

자기 자신에게 있다. 자기 문제의 반영이자

합리화다. 혐오는 자신과 타인의 인간성을

훼손한다. 악플이 대표적이다. 이에 반해 분노는

자신을 억압하는 대상에 대한 정당한 판단이며

스스로를 격려하고 존중하는 힘이다.

이처럼 혐오와 분노는 이유, 양상, 효과가

전혀 다른 인간 행동이다.[정희진, 낯선 시선, 83]


자유, 평화, 인권은 약자에게만 보장되어야 할

가치이지 보편적인 권리가 아니다.

그것이 모든 사람의 권리일 때 권리들 사이의

충돌로 인류는 멸망할 것이다.

강자(주류, 서구, 남성, 서울……)가 자신의 주장을

표현의 자유라고 말할 때,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테러이며 테러라고 불리는 저항(폭력)을

초래한다. 물론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누가 약자인가,

그것을 누가 정의 하는가 부터가 정치의

시작이기 때문이다.[정희진, 낯선 시선, 94]


모든 사회적 관계는 언어에서 시작한다.

다음 사례를 보자.

맘대로 해고를 ‘노동 시장 유연성’이라고 한다.

제주는 육지의 시각에서 보면 ‘변방’이지만,

태평양에서 보면 대한민국의 ‘관문’이다.

해남 주민들은 해남을 ‘땅끝 마을’이 아니라

땅이 시작되는 곳이라고 말한다.

장보기 같은 가사 노동은 노동인가, 소비인가?

서구인이 말하는 지리상의 발견은

발견‘당한’ 현지인에겐 대량 학살이었다.

강자의 언설은 보편성으로 인식되지만

약자의 주장은 ‘불평불만’으로 간주된다.

언어의 세계에 중립은 없다.

[정희진,낯선 시선,106]


우리의 최선은 “타인의 어려움을 알 수 없다는

‘좌절’을 인정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존중한다.”

정도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관계의 긴장과

고난의 여정에서 새로움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이제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주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동시에 내 안의 주변성을

탐색하는 것은 과거와 현재를 대립시키고

위계화하지 않는다. 이때 일상은 깨달음이

주는 아름다움의 연속이 되고 인생과 예술의

길이는 같아질 것이다.[정희진, 낯선 시선, 119]


어느 사회에서나 사회적 저항 차원에서든

언어유희 차원에서든 기존의 약속을 어기는

실천은 있기 마련이다. “파병하는 나라의

국민이고 싶지 않다.”라는 선언처럼 스스로

자기가 속한 사회의 구성원이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고, 사회에서 소외되거나 배제된

사람도 있으며, 사회적 약속, 다시 말해

기존 언어에 동의한 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사회 운동은 기존 언어 체계를 의심하고

‘교란’하고 ‘전복’하여 ‘국론을 분열’시키는

것이다. 국론이 분열되는 것은, 국론의

이름이란 미명 아래 보장되던 기득권층의

특권을 인식하고 그것이 마치 전체의 이익과

보편인 것처럼 만들어지는 과정을 드러내면서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와 이익이 가시화되는

것을 뜻한다. 굳이 언어가 사회적 약속이라는

의미를 고수한다면, 아마 작은 약속 혹은

작은 사회의 약속 정도가 될 것이다.

[정희진, 낯선 시선, 131]



ㅣ혼자서 본 영화


사랑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쉽다’.

그것은 동일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전엔 적대했으나 지금은 선망하게 된 타인,

나는 다가갈 수 없는 다른 세계에 사는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일은 경험하기 힘든 인간성이다.

사람은 사상, 사랑, 권력으로 변하지 않는다.

사람은 사람만이 변화시킬 수 있다.

<타인의 삶>은 타인의 삶이 나의 삶에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으며 나는 얼마만큼의 대가를

지불 할 수 있는 인간인가를 질문한다.

[정희진, 혼자서 본 영화, 110]



ㅣ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외로움은 타인과 나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나의 관계이다.

자신이 몰두하는 대상이 몸이 부끄러울 만큼 아름다울 때 외롭지 않다(“미천한 저의 사랑을 받아주세요”),

예술, 공부, 사회운동, 정치, 자연이 그런 대상이 아닐까.

[정희진,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154]


원하는 것이 없는 사람이 권력자다. 자기 충족적 삶은 최고로 힘을 지닌 상태다.

인간은 권력 지향적이기 때문에 권력감이 없으면 외로운데,

자기 몰두형 인간은 권력에 무심하다.

사실, 이 행복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된다.

[정희진,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154]


글은 아는 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버리는 과정이다.

앎이란,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지식을 다르게 배치하는 것이다.

지식이 자료에 불과함을 증명하는 일이다.

그래서 진보의 방식은 계속 걷기고, 보수의 도구는 과거를 지키는 익숙함(진부함)이다.

쉬운 말은 지배자, 사기꾼, 게으른 이들의 언어다.

한국 사회처럼 스트레스가 많은 곳에서는 선호될 수밖에 없다.

생각은 엄청난 노동이기 때문이다.

[정희진,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165]


과학자는 신이 아니다. 과학자이기 이전에 자신의 정체성, 자기 연구의 의미,

자신이 속한 사회의 역사와 언어, 개인의 위치성을 알아야 한다.

동물들의 행위가 약육강식인지, 협력인지, 경쟁인지, 돌봄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사람의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판단하는 사람은 누구인가를 먼저 질문해야 한다.

잠깐, 백번 양보해서 여성의 모든 문제가 호르몬이라고 치자.

그것도 모두 출산력과 관련이 있다면 저출산 시대에 여성을 보호하고 지지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언제나 인간 문제는 ‘팩트’ 여부가 아니라 ‘팩트’를 만들어내는 권력에 달려 있다.

[정희진,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241]



ㅣ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이제는 고전이 된 파이어스톤의 《성의 변증법》이나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은

모두 그들이 20대 중반에 쓴 작품이다.

자신이 피억압자라는 현실 인식에서 출발해 사회운동에 헌신하면서

그 과정의 분노와 열정이 걸작이 된 경우다.

글쓰기의 목적이 사회 변화에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글쓰기 자체가 사회를 다시 짓는 과정이다. 글쓰기의 목적은 결과에 있지 않다.

과정이 선하고 치열하면 결과도 그러하다. 글쓰기는 다른 삶을 지어내는 노동이다.

[정희진,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90-91]



ㅣ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


나는 인간과 사회의 ‘질‘은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마음과 지성의 용량(capacity)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글에는 발신 주소(address)가 있지만,

특히 고통에 관한 글은 발화자가 명확하지 않으면 문제가 된다.

글쓴이의 위치성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으면

남의 고통을 팔거나 나의 고통만 중요한 글이 된다.

고통의 공감 불가능성 때문이다.

[정희진, 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 86]




2026. 3.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