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해방을 쓴다. ‘너무 멀리 왔어’라는 표현을 처음 만난 건 영화 <제보자>에서였다. ‘국익’과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행한 비윤리적인 행위가 진실이 되어버린 상황에 대한 과학기술자의 한탄이었다. ‘멈췄어야 했는데 멈출 때를 놓쳤다’는 말이었다. 오늘의 제국주의 전쟁이나 자본주의 생산력 위기, 기후 변화, 자원 고갈, 식량난 등에 대한 소식을 접하면 ‘너무 멀리 왔어, 멈췄어야 했는데’라는 표현들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너무 멀리 온 것이 아니라 가던 길을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가야 할 길을 가는 것인데 멈추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칼 맑스가 자본주의 발전을 멈출 수는 없는 것이고 그 가운데 인류가 겪을 고통을 완화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했 듯이 ‘자본주의의 최고 발전 단계인 제국주의’(레닌) 시대에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침략과 학살 전쟁을 일삼는 것이 비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존의 진실이라면 너무 멀리 온 것도, 멈출 때를 놓친 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자본 권력과 제국 권력에 기생하는 소수 권력만이 살아남는 인류가 아니라 자본주의 발전의 끝이 공멸이 아니라 공멸의 시간을 늦추고 인류 공영의 길로 나아갈 수는 없는 것인지 물을 수는 있겠다.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해방을 쓰기 위해 나는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ㅣ너무 멀리 왔어
영화 <제보자>는 세계 최초로 인간배아줄기세포 추출에 성공했다는 이장환 박사(이경영)의 연구 결과가 ‘조작’이라는 제보를 받은 윤민철PD(박해일)가 진실을 파헤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거짓은 거짓을 낳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거짓의 본성이다. 거짓이 진실을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장환 박사는 자신의 연구가 거짓 이라고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연구가 누군가에 의해서 ‘부정’되지 않는 한 ‘국익’이나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비윤리적인 ‘조작’은 계속 될 것이다.
그의 연구가 누군가에게 거짓이어서, 비윤리적이어서 부정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부정된다는 것이겠다. 거짓과 진실, 윤리와 비 윤리는 한 몸인 것이다. 국익이든 발전이든 누구를 위한 어떤 이유 에서든 진실과 윤리에 의해 거짓과 비 윤리가 부정되기를 바랄 뿐이다.
영화가 자꾸 생각나는 건 이장환 박사의 ‘너무 멀리 왔어’라는 말 때문인 듯싶다. ‘멈췄어야 했는데 멈출 때를 놓쳤다’ 는 말이었다. ‘거짓’과 ‘비윤리’로 ‘조작’되어 온 그의 연구가 이미 ‘국익’의 이름으로 대중들에게 진실이 되어버린 것이다. 진실을 멈 출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의 연구가 거짓임이 드러나고 있었지만 과학자 이장환은 거짓 을 믿는 대중들의 진실을 부정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대중들이 진실이라고 믿어준다면 그것은 진실인가. 과학적으로 거짓을 규명하 는 데에는 지난한 시간이 걸리지만 맹목적 믿음에 근거한 진실은 꽤 오래가는 법이다.
ㅣ멈출 수 있는가
멈출 수 있는가라는 그 물음에 일말의 희망이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희망’은 아직 끝난 건 아니라는 의미에서의 희망이겠다.
생산력 증대를 멈출 수 있는가. 멈춘다는 건 끝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멈출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끝날 때까지 멈출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만물이 생성하여 운동하다 소멸하는 자연스러운 자연의 섭리일 것이다.
다만, 생산력 증대를 위해서 자연을 파괴하고 인간을 착취하고 학살 전쟁을 벌여야 하는가 물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 역시 살아야 한다는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물음일 것이다. 언젠가는 소멸하겠지만 끝날 때까지는 생존이라는 운동의 과정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생산력 증대를 멈출 수는 없더라도 그 방향을 바꿀 수는 있지 않은가라는 것이다. 무분별한 자연 파괴와 인간 착취와 자원 쟁탈을 위한 학살 전쟁을 치르지 않고도 생산력을 증대시킬 수 있지 않은가라는 물음인 것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물음 자체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경쟁을 벌여야 하는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는 것이기도 하다. 진화를 위해서 생존경쟁을 벌이고 생존을 위해서 생산력을 무한 증식하는 것은 자연의 법칙인데 경쟁이 아니라 협력을 통해서 생산력을 증대시키며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라기 보다는 인간들의 관념이 만들어 낸 '가치'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생존본능에 따르는 경쟁과 무한 증식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무분별한 자연 파괴와 인간 착취와 학살 전쟁을 벌이지 않으면서도 더불어 삶을 누리다 자연스럽게 소멸해갈 수 있는 방향으로 인류를 진화시켜 가는 것, 그럴 수 있는 인간 종種의 창조야말로 관념의 산물이기도 한 인류의 의미 있는 행위가 아닌가 싶은 것이다.
ㅣ만인의 조건이 되는
사랑과 교환할 수 있는 것은 사랑뿐이며, 신뢰를 교환할 수 있는 것은 신뢰뿐이다. 예술을 즐기고 싶으면 예술적인 교양을 쌓은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타인에게 영향을 끼치고 싶으면 실제로 격려하고 원조함으로써 그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당신의 모든 태도는 당신의 현실적이고 개성적인 삶의 특정한 표출, 더욱이 당신의 의지의 대상에 어울리는 표출이어야 할 것이다.(칼 맑스)
그렇게,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사람으로부터, 그러한 사람들이 모인 하나의 단체, 하나의 정당, 하나의 국가로부터 “각인의 자유로운 발달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달의 조건이 되는 사회”(칼 맑스)로 변화해 가는 것이겠다.
2026. 3.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