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해방을 쓴다. 과정. 모순, 지양, 미시론. 비동일자.. 변증법 혹은 아도르노의 변증법적 사유와 실천에서 인상적인 주제들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나에게 의미있게 다가오는 것은 ‘이분법’과 관련한 것이다. 이미 언급한 주제들도 이분법에서 자유롭지 않다. 과정과 결과, 모순과 차이, 미시론과 거시론, 비동일자와 동일자.. 그들 말고도 그와 같이 하나를 이루는 것들은 너무나 많다. 만물이 그러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신과 육체, 이성과 감성, 선과 악, 진실과 거짓, 자본과 노동, 남성과 여성, 자아와 타자와 같은 것들도 있다.
이분법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 중에는 ‘구분하되 분리하지 않는다’는 것이 있다. 그러니까, 그 양자는 동일하지도 않지만 무관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해서 어느 하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다른 하나와의 연관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기도 하다. 어느 하나가 없으면 성립이 안 되는 관계, 그 관계성 속에서 상호 작용하면서 지양의 과정을 통해 변화하며 소멸해 가는 그런 관계가 아닌가는 것이다. 그 양자는 한 몸이라는 점에서 공존한다는 것이고 생성도 소멸도 동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어떤 관계를 이룰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나에게는 중요해 보인다. 양자가 한 몸이지만 생성도 소멸도 동시적이지만 그 공존의 과정은 대립적인 것만은 아니지 않은가는 것이다. 그들의 생성 속에는 이미 상호 인정의 관계가 전제되는 것이 아닌가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다른 것이다. 다만 한 몸일 뿐이라는 것이다. 다른 양자가 공존할 때 성립되는 한 몸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생성되어 상호 작용하며 소멸해가는 것이니 다른 양자가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 공존하게 할 것인가라는 물음이 중요해 보이는 것이다. 그들이 소멸하기 전까지 말이다.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해방을 쓰기 위해 나는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ㅣ합리와 비합리
아도르노가 보기에는 비합리주의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측면이 있다. 인간이 합리적인 계몽 과정을 거치면서 몰아낸 비동일자, 사회적으로 무시당하거나 억압받는 요소들을 존중하려고 하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러니까 아도르노는 이성을 굉장히 강조하는 인물인데 동시에 비동일자를 절대 버려서는 안 된다는 걸 끝까지 고수한다. 그것을 계몽의 자기 치유적 측면이라고 본다. 계몽이 끊임없이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모든 걸 재단하고 잘라내 가지고는 결국 자연을 지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을 지배하고 타자를 지배하는 오늘날의 형태로 갈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아도르노가 나누는 것이 도구적 이성과 객관적 이성이다. 객관적 이성이라는 것은 (비동일자와 같은) 그런 문제들까지 다 고려할 수 있는 이성이다. 계산만 하고 그다음에 합리적으로 모든 걸 정리해서 끼워 맞추고 하는 그런 것은 도구적 이성이다.
그러니까 이제까지 계몽이 도구적 이성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고 본다. 합리적인 외양을 취하면서 실은 비합리적인 상태로 머물고 있다. 그러니까 오히려 비합리라고 내몰린 것들까지도 존중하거나 받아들여서 사회적으로 전체적으로 같이 갈 수 있는 구조를 생각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본다.
양자를 적당히 합치거나 아니면 여기다 보호 구역을 만들겠다는 그런 의미는 아니다. 합리 자체에 비합리적인 요소들이 어떻게 끼어들어서 작동하는가를 봐야 한다는 논리다. 헤겔이 그런 걸 꽤 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에서 헤겔은 합리주의자도 아니고 비합리주의자도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합리주의자다. 근데 그 합리의 의미가 비합리까지 다 내포하는 그런 의미다. 단순한 합리주의는 아니다. 도구적 이성은 결국 0, 1로 환원된다. 그렇게 해서 지배하기가 너무 편해졌다. 모든 걸 다 양화하고 계량화해서 되면 되고 안 되면 아니라고 하면서 잘라 버린다. 변증법은 그 대립 구도들을 종합해서 각각의 요소들로부터 그게 어떻게 반대로 넘어갔는가를 보려고 하는 것, 그러니까 비합리가 어떻게 합리적으로 작동하고 있는가. 합리가 어떻게 비합리를 이렇게 포함할 수 있는가 이런 사고를 하는 것이다.
칸트주의 같으면 잘 안 할 것 같다. 다 칸을 친다. 이성은 이성, 오성은 오성, 감성은 감성, 영역별로 탁 나누는 사고방식을 강력하게 온 사방에다 적용한다. 그런 칸막이 치는 사고방식들이 사방에서 등장한다.
ㅣ비동일자
‘비동일자’ 개념은 아도르노 철학에서 핵심 개념이다. 이른바 계몽적인 이성, 주로 도구적 이성, 모든 것들을 집어삼키는, 전부 돈으로 계산할 수 있고 어떤 틀에다 집어넣어야 하고, 관리될 수 있게 만들어 놓는 그런 현대 사회에서 그걸 좀 벗어나 있는 것들에 대한 여러 가지 표현들이 있는데 ‘타자’(Das Andere)도 그중 하나고 비동일자 개념에도 그런 게 항상 섞여 있다.
그렇게 관리되고 정리되고 그런 것을 벗어나 있는, 개념으로 딱 포착돼서 정리되는 게 아닌 그 개념 바깥의 것들 이런 것들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크게 보면 도구적 이성이라는 건 수단의 영역인데 효과적으로 뭘 하기 위한 건데 그것이 목적이 되어버린 것이다.
실제의 목적은 어떻게 보면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하고 행복하게 같이 잘 살자 하는 것이 목적일 수 있는데 그 목적들은 어디 사라져 버리고 이제는 그 도구가, 수단이 지배하는 그런 사회로 자꾸 되어가는 것이다.
이것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런 도구적 이성에 사로잡히지 않는 그 바깥의 영역이 비동일자 개념으로 얘기하는 것이다. 자연도 지배 대상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그 자체로 좋다’고 느껴지게 만드는 자연미의 영역, 자연미 그런 것들이 원형이라고 본다.
그런 영역을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근데 여기에도 조금 더 복잡한 변증법적인 얘기가 있다. 아도르노가 그렇게 생각하는 역사적인 혹은 사회적인 조건이 있는 것 같고, 그게 절대적인 건 아닌 것 같고. 그건 우리가 따져봐야 한다. 어쨌든. 아도르노한테는 비동일자 문제가 핵심적인 주제다.
우리가 개념으로 파악되지 않은 대상들을 개념화해갈 때 동일자로 묶이기 시작한다. 그러면 그렇게 안 되는 영역은 계속 남는다. 그 영역을 보통은 잘라버린다. 그 개념으로 파악 안 된 걸 알고 싶어 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고, 이렇게 되는데, 아도르노는 그 영역이야말로 철학이 다뤄야 할 영역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동일시’는 사유에 불가피한 면이라고 본다. 그렇지만 동일시하는 것만으로 끝내버리고 비동일자를 배제할 때 이른바 ‘동일성 사유’에 빠진 것이라고 비판을 받는 것이다. 동일시하는 것 때문이라기보다 동일시는 사유의 기본이고 그것에 매몰되는 것, 그것에 대한 자각이나 비판이 없는 것, 이게 문제라고 보는 것이다.
끊임없이 사유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개념을 통해서 파악된 것들을 놓고 그것들이 실제 대상과 부합하는지 안 하는지 거기서 빠져나간 것들의 중요성이 뭔지 따지는 작업을 통해서 사유의 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념을 통해서 본질을 파악했을 때 파악된 본질이 더 중요하냐 아니면 비동일자 영역이 더 중요하냐, 물을 수 있다. 아도르노는 아직 우리가 알지 못하는 부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얘기를 한다.
ㅣ전형
리얼리즘의 핵심 개념인 '전형'은 사유 개별 경험이 개별 존재 사건을 통해서 보편적인 문제들로 나아가려는 것이었는데 아도르노는 전형을 심하게 거부한다. 전형이 따로 없다고 보는 것이다. 어떤 개별자도 깊이 들어가면 그 안에 이미 현대사회가 너무 촘촘하게 얽혀 있어서 이 사회 전체가 드러난다는 논리다. 아도르노 논리는 어떤 개별자도 진정성 가지고 깊이 들어갈 때는 전체 사회가 드러나는 본질적인 문제가 나온다고 보는 것이다.
루카치는 리얼리즘의 역할이 있다고 본다. 현실의 근본 문제들을 들춰냄으로써 그걸 변화시킬 수 있는 의지나 인식을 전파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루카치는 전략적으로 사고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전형'은 적절한 사례들도 찾아야 하고 근본 문제를 다 보여주더라도 어떻게 보여주고 어떤 문제들을 더 보여주고 그 색깔이 다 다를 수 있다고 봐서 전형을 강조하는 것이다.
아도르노가 굉장히 치밀한 사고를 하는데도 ‘리얼리즘’을 자연주의 수준으로 깎아내린다. 그러면서도 리얼리즘 개념을 버리지는 못한다. 그게 아도르노의 세계관에서 나온다. 위계질서를 부정한다. 짜임 관계로 간다. 다 중심에서 같은 거리가 있다는 얘기를 한다. 어느 것이 전형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 다 어디서나 전형이 되는 것이다. 따로 전형이 없는 것이다.
전형 개념은 굉장히 전략적인 사고를 요구한다. 인간이 다 할 수는 없으니까 그래도 뭔가 집중해서 핵심적인 문제들을 보여주자는 것이다. 사태의 본질을 보여주는 갈등하는 인간들을 보여주고 그려내자 하는 것이다. 개인적인 삶을 통해서 사회의 핵심 문제들 갈등들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전형은 작품을 통해 사회의 근본 문제들로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는 요구다. 똑같이 근본 문제로 들어가는데 아도르노는 아무 데서나 들어가도 된다고 하는 것이고 루카치는 전형적인 것들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사태의 본질을 파악하고 드러내어 설득력있게 형상화해내는 작가의 능력 문제이기도 하겠다.
2026. 3.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