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해방을 쓴다. 나는 해방을 글로 쓰지만 음악으로 그림으로 춤으로 영화로 그 무엇으로 해방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해방을 짓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들 문학, 예술 작품들을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글로 쓰며 해방을 짓는다. 그 행위를 나는 문학, 예술 작품들과의 만남이라고 표현한다. 그 작품들을 감상하는 것은 하나의 작품을 만나는 것이기도 하고 그 작품을 창작한 창작자를 만나는 일이기도 하고, 창작자가 창작한 작품에 담긴 하나의 세상을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감상이라는 표현보다 만남이라는 표현을 쓴다. 적어도 그 작품들에 대한 감상을 이렇게 글로 표현하는 경우에는 감상을 넘어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글로 창작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나는 하나의 작품과의 만남을 통해 글로 나의 해방 세상을 짓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창작자와 함께 하나의 해방 세상을 지으려는 것이다.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해방을 쓰기 위해 나는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ㅣ바르다와 함께한 시간들
예술은 놀이다. 노는 게 예술이니 잘 놀면 예술이다. 신명 나게 노는 이들을 보면 예술이라는 말이 입에서 저절로 나온다. 누구나 놀 수는 있지만 ‘잘’ 놀아야 예술이다. 잘 놀면 예술이 되지만 잘 논다고 예술가는 아니다. 예술가는 재능도 있고 기능도 가지고 있지만 그 무엇보다 예술에 ‘자신’을 담을 줄 아는 사람이다.
즐겁게 놀고 싶은 것이지 즐거워야 놀이는 아니다. 그런 점에서 놀이는 인간의 여러 활동 중 하나이다. 예술도 활동이다. 재능과 기능을 바탕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활동이 예술이다. 인간은 누구나 예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상의 활동이 예술이 되어 삶이 예술이 되기도 한다. 누구나 예술을 하지만 다 같은 예술도 아니다.
예술작품에는 예술가 자신이 담겨있다. 나는 예술가가 작품을 통해 표현한 작품에서 예술가의 ‘생각’을 엿본다. 사람과 세상에 대한 그 예술가의 생각을 감상한다. 그 생각이 어떻게 표현되든 표현 방식이 어떻든 예술작품은 예술가의 ‘생각’의 표현이다.
영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Faces Places)>에서 감독 바르다의 ‘생각’을 엿보았다. 바르다와 사진작가 JR은 마을과 일터를 찾아가 사람들의 사연을 듣고 사연과 얼굴을 담은 모습을 촬영해 그들의 마을과 일터에 전시한다.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 없고 소중하지 않은 사연도 없다. 세상에 하나뿐인 얼굴, 삶의 흔적이 새겨진 얼굴, 얼굴에는 눈이 있고 눈을 통해 그 사람을 본다. 손과 발을 통해서도 본다. 마을에서 일터에서 소중하지 않은 얼굴은 없다.
사람들의 얼굴과 모습을 사연에 따라 촬영하여 마을과 일터에 예술작품으로 전시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얼굴을 찾아주고 일터에서 존재감도 느끼게 하고 사람들 사이의 연대감도 갖게 한다. 그들의 예술 활동에서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바르다와 JR이, 그리고 그들과 사람들이 함께하는 시간이었다. 사연을 듣고, 작품을 구상하고 전시하는 과정, 예술작품이 탄생하는, 그들이 함께 작품을 만드는 그 활동의 시간이 좋았다.
그 과정 자체가 이미 즐겁고 행복한, 서로를 하나로 이어주는 활동에서 바르다의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 개개의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공감하고, 노동자들의 연대의식을 표현해 줌으로써 또 다른 의식을 일깨운다. 그리하여 마을과 일터에 전시된 사진은 바르다 자신을 담은 바르다와 사람들의 예술이 되었다.
바르다가 사진에 담은 것은 그저 사람들의 얼굴이나 모습이 아니라 바르다가 빚은 것들이다. 바르다의 생각이 빚어낸 예술이다. 그 생각이 예술작품으로 표현되어 함께했던 사람들과 살아 숨 쉰다. 그들의 마을과 일터는 예술작품의 전시장이 된다. 이제 바르다를 통해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삶을 예술로 만드는 활동을 할 수 있다면 그들의 삶은 예술이 될 것이다.
바르다와 JR처럼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얼굴을 사진에 담는다. 사진에는 사람들의 얼굴과 함께 자신의 ‘생각’이 담긴다. 그 생각은 자신이 바라는 사람과 세상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의 그 생각을 담았다는 것이 중요할 것이고 이미 갖고 있을 그 생각을 잘 담았느냐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예술이 아니 되어도 잘 노는 활동은 삶에서 중요해 보인다. 마을에서 일터에서 잘 노는 게 잘 사는 길이기도 하다. 무엇을 하며 놀든 사람들과 함께 세상을 살면서 내 생각대로 놀 수 있다면 예술가라 불릴 것이다. 그 자체로 즐거웠던 바르다와 함께한 시간들.
ㅣ춤이라서 다행이다
춤을 좋아한다. 춤을 추는 것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춤을 잘 추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춤을 출 일도 잘 없고 못 춘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그래도 춤을 좋아한다. 춤추는 것을 보는 것도 좋아하고 춤출 기회가 있으면 가볍게 음악에 맞춰 리듬을 타는 정도의 춤을 춘다.
지금은 잘 기억도 안 나지만 ‘탈춤’을 배운 적이 있다. 안동에서 열리는 국제 탈춤 축제에도 몇 차례 다녀온 것 같다. ‘몸짓 패’들을 가까이할 기회가 있었고 그들의 ‘몸짓 공연’을 보면 흥분되기도 한다. 비보잉을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춤’하면 발레가 생각나기도 한다. 영화 <빌리 엘리엇> 때문이기도 하고, 쿠바 여행에서 유명한 발레 공연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공연은 못 봤지만 대신 그들 공연단이 연습하는 모습을 지켜봤던 것도 춤이 떠올려주는 기억 중 하나다.
나에게 ‘춤’이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 것은 중남미와 쿠바 여행 때문일 것이다. 라틴댄스를 제대로 배운 것은 아니지만 그들과 춤을 매개로 함께 어울리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일이었다. 실제로 춤을 추기보다 보는 것, 가볍게 즐기는 나에게 춤은 말 그대로 ‘즐거움’을 주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춤을 실제로 추는 이들을 통해서 보고 듣고 느낀 바를 더하자면, 춤은 몸짓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예술이지만, ‘유대’나 ‘결속’과 같은 단어와도 연결된다고 여긴다.
우리의 ‘탈춤’에도 해학적인 요소가 담겨 있듯이, 흑인들의 라틴댄스에도 즐거움을 넘어선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요소가 담겨 있다고 여긴다. 역사학자 최윤오는 <쿠바, 춤추는 사회주의>라는 책에서 쿠바 사회를 ‘춤추는 사회주의’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 의미는 쿠바 사회가 그들만의 방식으로 시간과 공간을 채워왔다는 것, 경직되지 않은 사회, 다양한 주민만큼 다양하게 혼종 된 종교를 인정하는 것, 그럴 수 있는 힘이 춤(문화)에 있기도 하다는 것이었다.
개인적인 경험 속에 담긴 춤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이웃 작가님이 소개하여 본 <유월>이라는 단편 영화 때문이다.
영화는 춤이라는 몸짓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아이들에게 화가 나 벌칙을 주던 선생님의 하품으로부터 전염된 아이들의 몸짓이 애초에 아이들의 몸도 그들 사이도 분절된 병자들과 같은 것이었다면, ‘뭐 어때요. 괜찮아요’라는 유월의 위로의 말과 함께 선생님 혜림과 유월이 마주 보며 웃는 웃음을 통해 아이들의 몸짓은 그들을 연결해 주는 아름다운 몸짓으로 변한다.
영화를 보고 나서 내 몸이 나에게 말한다. 전염된 것이 춤이라서 다행이라고, 춤은 우리를 이어주기도 하니까라고 말이다.
ㅣ마라와 사드
페터 바이스의 <마라와 사드 Marat/Sade>에는 작가의 사회변혁에 대한 고민이 담겨있다. 변혁을 위한 개인의 희생과 권력에 대한 고민들은 우리의 것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을 통해서 그가 품고 있는 고민들을 따라가 보는 것은 의미 있어 보인다.
개인은 사회로부터 어디까지 자유로울 수 있을까? 사드가 제기하는 마라식 혁명의 문제점은 개인의 자율성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즉, 마라에게는 ‘현실을 무심히 보는 대신, 옳고 그른 것을 주장하고 그릇된 것을 바꾸고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사드는 “왜 바깥세상의 걱정을 하나? 내게는 나 자신의 내면세계가 훨씬 더 또렷한 실체일 뿐”이며 “나는 오직 나만을 믿을 뿐”이라고 말한다.
사회 속에서 개인들에게 법과 제도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규율과 통제는 개인들이 모여 살아가기 위해서 불가피한 것 아닌가? 문제는 그러한 규율과 통제가 개인들에게 억압으로 느껴질 때 독재국가나 획일적인 전체주의를 떠올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규율과 통제가 개인들을 억압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쿠제의 지적처럼 과잉억압과 필요억압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필요와 과잉의 경계를 누가, 어떻게 설정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한 억압에 대한 경계 역시 자의적으로 규정될 수는 없는 것이다. 개인들이 억압으로 느낀다면 그 순간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개인들이 얼마나 사회의 규율과 통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쪽으로 문제를 제기해야 하지 않을까? 만일, 사회구성원 개개인이 마라처럼 더 나은 사회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고 개선하려 노력한다면 권력에 의한 과잉억압이 생겨나기 힘들 것이다. 문제는 오히려 그러한 과잉억압이 있음에도 개개인들이 억압으로 느끼지 않는 경우일 것이다. 헉슬리나 아도르노의 지적처럼 ‘노예상태를 사랑하는 현상이나 대중들의 체질화된 수동성’은 현대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 아닌가?
마라와 사드 사이에서 생각해봐야 할 중요한 문제는 당 중심의 변혁이냐 자율적인 주체들에 의한 변혁이냐는 문제일 것이다. 독점 권력에 맞서기 위해 만인이 평등한 사회를 위해 개인들의 연대는 필요하다.
그런데, 그 중심이 당이냐, 아니면 각성된 자율적인 주체냐의 문제인 것이다. 사드가 보기에는 마라식의 방식으로, 즉, 몇몇 지도자가 이끄는 당 중심이 되었을 때, 그 당이 또다시 권력화하여 민중들을 억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각성 된 개인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인한 사회변혁에 대해 고민할 수 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당에 의해 개인들이 조직되지 않은 자율적인 주체들에 의한 사회변혁이라는 것은 멀게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지롱드파의 뒤삐레와 꼬르데이가 말하는 “모두 단결되었으면서도 누구의 명령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사회, “개인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사회에 대한 기대는 현재의 모습이 아니라 지향점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사회가 된다면 굳이 개인에 대한 규율과 통제로 인한 과잉억압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개개인들이 자발적으로 부와 권력을 나누며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라면 굳이 마라와 사드 사이에서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과연 누가 ‘희생’되어야 하고 누가 ‘권력’을 장악하는가의 문제일까? 즉, ‘누구’의 문제일 뿐일까? 프랑스 혁명기의 공포 정치가 무서운 사건이었음에 틀림 없어 보인다.
하지만, 과연 빈곤과 실업의 참상에 비하면 어느 쪽이 더 무서운 것인지, 사회변혁의 과정에서 겪게 되는 희생은 그것이 아무리 비싼 대가라 할지라도 결국 그들이 제거하고자 하는 해독이나 현 제도하에서 일어나는 전쟁의 참상보다 가벼운 것이 아닌지, 프랑스 혁명의 공포가 우리 가슴 속에 거창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다수의 거룩하신 귀족들이 희생자가 되었고 또 우리는 특권층이 곤경에 빠지면 더 애처롭게 생각하는 습관이 있을 정도로 그들을 존중하는 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은 아닌지, 물을 수 있다.
혁명을 통해 얻게 되는 대가는 희생에 비할 바 아니라고, 귀족들의 희생과 대중들의 희생을 똑같이 취급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한 변혁의 과정에서 겪는 희생은 불가피한 것이며, 오히려 고귀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것이 귀족들의 희생이라면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드는 말한다. “교수대의 칼날은 떨어지기 바쁘게 다시 감겨 올라갔지. 그런데 그렇게 되면서 복수의 의미가 사라지고 그저 기계적으로 변한 거야. 교수형이란 재미도 없고 비인간적인 데다가 기술적으로 처리되다니. 마라, 그 제서야 나는 알았어. 이 혁명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이제 각 개인의 특성은 사라지는 거야. 그 대신 서서히 획일화되어 가지... 이제 국가는 각 개인과 아무런 관계도 없어. 막연한 전체가 있을 뿐이지.” “사람들에게는 튼튼한 쇠사슬로 연결된 것 같은 강한 연대 의식이 없어. 아니 실낱같은 공동의식조차 안 보이지. 그런데, 자네는 아직도 온 인류가 하나로 통일될 수 있다고 믿나? 이상주의자 몇 명이 화합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해냈다는 결과가 뭐지? 하찮은 일 때문에 서로 죽이는 꼴 아닌가.”
이러한 사드의 냉소 속에는 어떠한 권력도 거부하겠다는, 어떠한 개인에 대한 억압도 거부하겠다는, 어떠한 형태의 정부도 거부하겠다는, 오직 개개인들의 자유로운 조화를 바란다는 점에서 ‘무정부주의’를 추구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마르쿠제가 지적하는 것처럼, 사드가 생각하는 자유로운 사회란 인간의 자연스러운 충동의 발산과 자기실현의 자유로운 공간을 만드는 것이 가능한 사회인 것이다.
페터 바이스를 통해서 어떠한 해답을 얻을 수 있을까? 페터 바이스 역시 배고픔과 독점 권력에 의한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로서의 공동체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작가가 보기에 마라와 사드는 모두 기존의 질서에 저항하는 혁명가들이다.
다만 서로 다른 길을 가고자 할 뿐이다. 마라식의 정치 권력을 통한 혁명과 개인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성(性)의 해방을 통한 혁명, 어느 한쪽만을 선택할 수는 없는 문제일 것이다. 당내의 민주화와 개인들의 끊임없는 각성에 대해 요구하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페터 바이스의 <마라와 사드>를 통해 혁명에 대해 논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로 보인다. 더 나아가 그의 작품이 전 세계적으로 여전히 주목을 받으며 공연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의미 있어 보인다.
하지만, 물의를 일으키지 않으려는 조심성, 안락과 순응주의, 가족이기주의, 개인주의에 대한 예찬. 자신에 만족하며 정신적인 것보다 물질에, 가능성 있는 것보다 수익성에, 미지의 것보다 이미 아는 것에 우위를 두는 개인들이 넘쳐난다는 사실은 다시 한번 현실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가기보다 현재의 세상에 만족한다고/만족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더 나은 세상에 대한 바람을 가진다는 것은 ‘권력에의 의지’일 뿐일까? 아니면, 더 나은 세상 만들기의 어려움과 불가능함을 경험해버린 패배주의자들의 비겁한 변명일 뿐일까? 하루하루 먹고살기에 바쁜, 너무나 각박해져 버린 현실 속에서 더 나은 세상을 꿈꾼다는 것은 한낱 몽상에 불과한 것일까?
하지만 적어도 더 낫지는 않더라도 지금과는 다른 세상에 살아 보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라고 한다면 현실 만족이라는 것 역시 불만족스러운 현실을 그럴듯하게 포장해 안락한 현실이라는 환상을 생산해내는 지배이데올로그들의 부단한 노력의 결과일 것이다.
물론, 그러한 환상 속의 현실 역시 현실이기는 하다. 결국 어떤 현실을 살아갈/만들어 갈 것인가? 라는 물음은 개인의 선택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실이라는 것은 개개인이 자신을 포함한 다양한 주체들이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 다르게 생성될 수 있는 진행형으로서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2026. 3.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