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을 쓰자 51

by 영진

나는 해방을 쓴다. 해방을 글로 쓴다. 해방을 노래할 수도, 그림 그릴 수도, 춤출 수도 영화를 제작할 수도 있겠지만 글로 나는 해방을 쓴다. 글로 해방을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나에게 묻는다. 글로 해방을 쓰는 행위, 해방을 위해서 글을 쓴다는 행위 자체가 해방을 위해서 중요하다고 나는 답한다. 해방을 쓴다는 것은 해방을, 해방의 의미를, 해방의 방식을, 해방의 세상을 생각하는 것이기도 하다. 해방에 대한 생각을 쓰는 것이 해방의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글의 형식이 무엇이든 글을 잘 쓰든 못 쓰든 해방을 쓴다는 행위 자체야 말로 중요하다고 나는 답한다. 해방을 쓴다는 것은 자신이 바라는 삶에 대해 생각하고 글로 쓰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그 자체가 의미 있고 즐겁고 행복한 일일 수 있을 것이다. 글쓰기나 생각하기의 어려움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글이나 생각이 타인을 위한 것,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타인에게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오직 자신의 삶을 위한 것이기에 자신을 배려하는 일이기도 한 것이기에 자기 삶을 아껴주는 일이기도 하기에 더 소중한 행위라고 할 수 있겠다. 해방을 쓰자.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해방을 쓰기 위해 나는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ㅣ명저의 탄생


‘문장’은 ‘생각’이 표현된 것이라고 여긴다. ‘문장’에는 글쓴이의 ‘생각’이 담겨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혹자는 문장이 아니라 ‘단어’ 하나에도 이미 글쓴이의 생각이 담겨 있다고 보기도 한다. 어떤 단어를 쓰느냐에 따라 문장의 의미가 달라지기에 글쓴이의 ‘생각’에 따라 선택하는 단어(어휘)가 달라지기에 틀린 말도 아닐 것이다.

문장은 단어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동일한 대상이나 현상에 대해서도 글쓴이의 생각(세계관, 가치관)에 따라 선택하는 단어가 달라지는 것이니 말이다. 글쓴이의 생각이 표현된 것이 ‘문장들’이고 ‘문장들’에는 글쓴이의 생각이 담겨 있는 것이니, ‘문장’은 ‘생각’을 담는 그릇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그릇에 담느냐에 따라, 즉, 어떤 문장을 쓰느냐에 따라 글쓴이의 생각이 읽는 이에게 더 잘 전달될 수 있을 것이니, 그만큼 문장은 중요한 것이다. 나의 생각을 어떤 문장으로 옮길 것인가. 많은 문장을 읽음으로써 내 생각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문장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문장에는 글쓴이의 생각이 담겨 있기에 많은 문장을 읽는다는 것은 많은 생각을 읽는다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글쓴이와 함께 생각을 확장해 갈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을 읽을 것인가. 과연, 지금, 우리에게 ‘고전’과 ‘명저’는 어떤 책인가. ‘고전’과 ‘명저’라고 일컬어지는 책들이 시대를 뛰어넘어 읽히는 책이라는 점에서, 그 기준은 다를 수 있지만, 내가, 우리가 꺼내 놓을 책은 많을 것이다. 여전히 읽지 못한, 읽어야 할, 읽고 싶은 고전이나 명저는 많다.

그들을 읽을 시간조차 충분하지 않음에도 그 시간의 일부를 나누어 ‘지금, 여기’, 나의 곁에서 살아 숨 쉬는 우리들의 생각을 읽고 싶은 것이다. 우리들의 생각을 나누고, 서로의 생각을 읽는 시간을 통해서 우리들 스스로가 ‘고전’과 ‘명저’를 써나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많은 ‘고전’과 ‘명저’들 역시 그 이전의 ‘고전’과 ‘명저’를 통해 자신들이 살았던 시대를 치열하게 읽어낸 이들이 써 놓은 책들이라고 여긴다. 그러하듯이, 그들 ‘고전’과 ‘명저’를 읽은 우리들이 ‘지금, 여기’의 삶을 치열하게 써나감으로써 우리가 ‘고전’이 되고 ‘명저’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전에는 없었던, 이 세상 하나뿐인, ‘지금, 여기’ 이 시대의 ‘고전’과 ‘명저’는 그렇게 탄생하는 것 아닌가. 나는 그렇게 알고 있고, 믿고 있다.



ㅣ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적합한 표현(어휘)과 완결된 문장(문법)’을 쓰는 것이 글쓰기의 기초라고 여기고 있다. 이때 글쓰기의 목적은 ‘정보 전달’과 ‘소통’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을 ‘글’을 통해서 상대방에게 제대로 전달하는 것이다. 서로의 생각을 제대로 아는 것. 소통의 시작일 것이다.

글쓰기는 어렵다고 말하고 필자도 그렇게 생각한다. 다른 글을 많이 읽어서 표현을 풍부하게 하고 많이 써 봄으로써 비문을 줄여 문장의 완성도를 높인다면 적어도 ‘정보 전달을 통한 소통’, 즉 ‘의사소통’을 위한 글쓰기는 수월할 것이다.

글쓰기의 기초가 그렇듯이 ‘글 읽기’의 기초도 마찬가지라고 여긴다. 글을 읽고 이해하려면 글에 쓰인 표현들을 제대로 알고 문장으로 이루어진 글에 대한 이해력을 높인다면 글쓴이와의 의사소통은 수월할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의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여긴다. 글쓰기와 글 읽기의 기초가 그 간극을 메워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글의 내용을 이루는 입장의 차이에 따른 간극은 소통을 어렵게 한다. 글의 문법이 아니라 마음의 문법이 중요해진다.

글쓴이의 마음까지 헤아리며 글을 읽겠다는 독자의 마음가짐은 마음 문법의 기초라고 여긴다. 글쓴이의 마음 읽기 역시 읽는 사람 마음대로여서는 힘든 일이다. 오히려 더 글 읽기의 기초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낱말과 낱말, 문장과 문장 사이를 면밀히 살피는 행간 읽기와 맥락 읽기가 충실성을 더해 줄 것이다.

적극적으로 해석도 해야 할 것이다. 해석은 다양할 수 있다. 그 때문에 글을 읽는 묘미가 생기기도 한다. 글을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이 함께 글을 쓰게 되는 것이다. 소통을 위한 글에서 소통을 하며 함께 쓰는 글이 되어 가는 것이다.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생각들이 탄생할 수도 있다. 물론, 상대의 마음까지 헤아리며 읽고 해석할 때 가능할 수도 있는 일이다.

흔히 글을 쓰는 사람은 ‘특수’를 ‘일반’화 해서는 안 된다는, 글을 읽는 사람은 ‘곡해’해서는 안 된다는 주의를 받는다. ‘일반화’는 ‘오류’, ‘곡해’는 ‘잘못’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오류’나 ‘잘못’이라는 판단은 누가 어떻게 하는 것일까.

올바른 해석이 무엇인지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곡해인지 아닌지, 일반화인지 아닌지 누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곡해’ 라거나 ‘일반화의 오류’라는 판단도 하나의 해석인 것이다. 그렇게 해석하며 마치 자신의 해석이 올바른 것처럼 곡해하거나 일반화하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는 것이다.

‘곡해나 일반화’를 주의해야 하지만 곡해라거나 일반화라는 판단 자체도 주의해야 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곡해나 일반화’ 일지도 모르는 해석을 마치 진실인 양 퍼트리고 믿게 만들려는 권력도 경계해야 할 것이다. 때로는 읽고 해석할 때 송곳 같은 독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글쓰기와 글 읽기의 기초는 소통을 수월하게 해 주어서 억지와 불통과 불신을 낳지 않게 해 줄 것이다. 그들 탄탄한 기초가 만나면 비로소 소통과 교감을 넘어 감동과 비판과 성찰과 상상을 넘어 사고와 시야의 확장을 가져다줄 것이다. 기초는 중요해서 어렵다.



ㅣ나에게 쓴다


내가 쓰는 모든 글은 ‘나에게 쓰는 편지’다. 너에게 당신에게 그들에게 쓰는 글이기도 하지만 나에게 쓰는 편지다. 나를 위해 쓰는 글이다. 혹여 나의 글을 읽고 당신이 불편하다면 나의 글이 당신에게 불편할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읽는 모든 글도 나를 위해 읽는 글이다. 나는 어떤 글을 읽고 평가하지 않는다. 평가하지 않으니 남의 글을 읽고 불편할 일도 없다. 그럼에도 나를 불편하게 하는 내용이 있다면 그를 통해 나는 나를 읽는다. 나를 돌아보게 해 주어서 감사하게 여긴다.

나에게 재미도 감동도 배울 것도 없는 무의미한 글은 없다. 다만 글쓴이가 자신에게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를 읽으려 애쓸 뿐이다. 우리는 서로를 읽는다. 서로를 위해서 말이다. 읽고 쓰는 것은 각자의 몫일 수밖에 없다. 다만, 서로, 읽어주는 것, 쓰게 해주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나는 주로 ‘자본주의’를 읽는다. 자본주의와 나의 삶의 관계를 읽는다. 나는 ‘자유과 평등’, ‘사랑과 아름다움’을 읽는다. 자본주의와 그것들의 관계를 읽는다.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라는 책에서 맑스의 ‘필요와 자유’에 대한 글쓴이의 입장을 읽는다.

맑스는 ‘필요의 영역’과 ‘자유의 영역’을 구분했다. ‘필요의 영역’이란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여러 생산·소비 활동의 영역을 가리킨다. 그에 비해 ‘자유의 영역’은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지는 않아도 인간다운 활동을 위해 필요한 영역이다.

맑스는 ‘자유의 영역’을 확대하길 추구했다. ‘자유의 영역’을 확대하는 것이 ‘필요의 영역’을 없앤다는 뜻은 아니다. 인간에게 의식주는 반드시 필요하고 의식주를 위한 생산 활동도 결코 없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자유의 영역’은 ‘필요의 영역 위에서만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이다.

맑스가 추구하는 ‘자유의 영역’은 물질적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에서 시작된다. 집단적이고 문화적인 활동의 영역에야말로 인간적 자유의 본질이 있다고 맑스는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니 ‘자유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무한한 성장만 좇으며 사람들을 장시간 노동과 제한 없는 소비로 떠미는 시스템을 바꾸어야 한다.

설령 총량을 보았을 때 지금보다 생산이 줄어든다고 해도, 전체를 보았을 때는 행복하고, 공정하며, 지속 가능한 사회를 향한 ‘자기 억제’를 자발적으로 해야 한다. 마구잡이로 생산력을 키우는 게 아니라 자제를 하여 ‘필요의 영역’을 축소하면 ‘자유의 영역’이 확대될 것이다.

내가 쓰는 모든 글은 ‘나에게 쓰는 편지’다. 그러니 나에게 쓰는 글에 의해 ‘일반화’되지 않기를, 나의 글의 ‘거짓과 허위’에 속지 않기를, 나의 글에 ‘선동’되지 않기를 바란다. 당신이 그러지 않으면 된다. 그건 오직 당신의 몫이다. 모든 글에 담겨 있는 ‘부분적 진실’을 읽어 내는 것도 그렇다.

나는 모든 글을 그렇게 읽고 나에게 ‘다시’ 쓴다. 모든 글에 담겨 있는 ‘부분적 진실’을 읽어 내라고 일반화되지도 거짓과 허위에 속지도 선동되지도 말라고 나에게 쓴다. 어렵지 않은 일이다. 세상에 하나뿐인 나 자신을 배려하는 마음과 잠시 돌아보는 시간이면 가능하다.

자본주의와 나의 삶의 관계를 읽음으로써 나는 나에게 ‘자유’를 쓴다. ‘평등’을 쓴다. ‘사랑과 아름다움’을 쓴다. 자본주의가 나에게서 빼앗아 간 빼앗아 가고 있는 것들을 쓴다. 자본주의에 대해서 읽고 쓰는 것으로 내 소중한 것들을 되찾을 수 있다. 나에게 쓴다.




2026. 3.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