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을 쓰자 52

by 영진

나는 해방을 쓴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은 어릴 적부터 버릇을 잘 들여야 한다는 사실, 한번 들인 버릇은 쉽게 바꾸기 어렵다는 사실을 떠올려준다. 개인의 습관, 사회의 관습을 버릇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최초의 역사서 <역사>를 쓴 헤로도토스는 당대의 핀다로스라는 시인의 말을 빌어 ‘관습은 만물의 왕’이라고 쓴 바 있다. 그 때의 ‘관습’은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자연의 질서와 같은 것이었다. 인간이 만든 질서라기 보다는 인간 이전부터 존재했던 자연의 질서와 같은 것이었다. 강자가 약자를 노예로 삼거나 조공을 강요하고 약탈(전쟁)을 하는 것도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자연의 질서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헤로도토스는 전쟁의 원인을 그런 자연의 질서를 따라 굳어진 관습에서 찾는 듯하다. 자연의 질서와 같은 관습을 바꾸는 것은 그와 다른 관습에 대한 경험에서 찾는 듯하다. 다른 것에 대한 경험에 따른 것이든, 인간 이성의 반성적 사유, 성찰에 따른 것이든 지금, 여기에서부터 자신부터 다른 삶을 살고 있어야 다른 세상은 가능할 것이다.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해방을 쓰기 위해 나는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ㅣ다름과 옳음


헤로도토스는 [역사] 3권에서 고대 페르시아의 왕 캄뷔세스가 완전히 실성했다고 진단한다. 캄뷔세스가 자신의 친동생과 누이를 죽였을 뿐만 아니라 동맹국들의 신전에 들어가 그곳 신상들을 실컷 조롱한 다음 불태워버렸기 때문이다. 헤로도토스는 “세상의 어느 민족이든 모든 관습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을 선택하라고 하면 일일이 검토한 뒤 자신들의 관습을 선택할 것이다. 그만큼 모든 민족은 자신들의 관습이 가장 훌륭하다고 믿고 있다.”라고 여긴다. 그런데 그들 민족의 신앙이나 관습을 조롱한다는 것은 미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헤로도토스는 그리스와 인도의 장례관습을 예로 들어 그들 민족이 자신의 관습을 대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다레이오스 왕이 페르시아를 통치하던 시절 측근의 그리스인들을 불러 돈을 얼마나 주면 죽은 부모의 시신을 먹을 수 있겠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돈을 아무리 많이 줘도 그런 일은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다레이오스 왕은 이번에는 부모 고기를 먹는 풍습을 가진 칼라이타이라고 불리는 인도인들을 불러, 어느 정도의 돈을 주면 죽은 부모를 화장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그 인도인들은 큰 소리로 왕에게 제발 그런 말은 하지 말아 달라는 간청을 했다.”

헤로도토스는 관습의 힘이란 그런 것이라고, 즉 “관습(노모스)이야말로 만물의 왕”이라는 그리스 시인 핀다로스의 시구는 진실로 옳다는 말로 관습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왕보다도 힘이 센 만물의 왕이 관습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관습을 조롱하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캄뷔세스가 실성했다는 헤로도토스의 진단에 완전히 동의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진단보다 정작 궁금한 것은 캄비세스가 왜 인간으로서 도저히 해서는 안 될 그런 행동들을 했는가라는 점이다. 이런 의문이 드는 것은 단지 캄뷔세스 개인의 문제(질병이 있었다거나)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캄뷔세스 이전의 왕들에게서도 그런 미친 모습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대 페르시아의 왕들은 그야말로 신(神)과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왕의 말씀은 곧 신의 말씀이요 신의 말씀은 곧 왕의 말씀이었다. 그런 말씀은 거역할 수 없는 무조건 따라야 할 ‘자연의 이치’로서 관습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대 그리스어 nomos(관습)는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왕보다 관습이 더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습은 왕이 만들며 왕의 말씀이 곧 관습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인지 캄뷔세스가 누이와 결혼하고 싶어 법을 바꾸는 것은 대수로워 보이지 않는다. 왕이 곧 신이요 관습인 고대 사회에서 왕이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보일 정도다.(그런 이유에서 [역사]에 등장하는 고대의 왕들 중 오히려 이상해 보이는 왕이 데케이오스다. 그가 정의를 중요시하고 다른 민족을 침략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렇다.(1권 참조).

캄뷔세스는 미친 것이 아니라 평소 하던 관행대로 했던 것일 뿐이다. 권력이 사람을 미치게 만든 것이며 미쳐도 괜찮게 만들어 주는 것이 법과 제도를 뒷 받침해주는 관습이다. 왕이 무슨 짓을 해도 따라야 하는 것이 그 시대의 관습이라면 무엇을 상상하든 그 보다 더 미친 짓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그런 미친 권력을 견제할 제도적인 장치가 있는가라는 것과 국민들의 태도일 것이다. 국민들이 그런 미친 권력을 자연의 이치로 받아들이는 시대였기에 그런 미친 행동이 가능했을 것이고 그런 국민들이 권력을 견제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할 길은 없었을 것이다.

캄뷔세스가 죽고 다레이오스가 왕이 되는 과정에서 기존 정치체제에 대한 도전이 있었다. 민중들이 정치를 하는 민주제, 귀족들이 정치를 하는 과두제가 주장된 것이다. 하지만 결국 군주제를 주장한 다레이오스가 왕이 된다. 세 정치체제 모두 문제를 가지고 있지만 당시 문제적이었던 군주제가 아닌 ‘다른’ 정치체제가 경험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아쉬운 대목이다. 정치체제가 국민들을 제약하기도 하지만 국민들의 정치 참여를 이끌어낼 수도 있고 국민들은 참여와 견제를 통해 더 나은 정치체제를 만들어 가기도 한다는 점에서 아쉬운 것이다.

기존의 관습을 자연의 이치로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오랜 시간 다수가 따르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 덕분에 훌륭한 관습이 유지되기도 한다. 문제는 악습 역시 자연의 이치로 받아들이기 쉽기 때문에 바꾸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오랜 시간 다수에 의해 통용되어 습관처럼 굳어진 ‘기존의 것’이라는 이유에서 관습은 힘이 센 것이다. ‘악습’이라는 판단 자체가 힘들 수 있으며 ‘악습’이라고 문제 삼는 것은 불온한 소수의 목소리로 묻히기 십상이다.

‘자연(自然)의 이치’를 거스르는 것은 현명해 보이지 않는다.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그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인간들의 삶을 편리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들의 세상에서 ‘자연의 이치’는 온전히 자연만의 이치일리 없다. 인간들이 만들어 가는 ‘인간의 이치’이기도 한 것이다. 인간의 이치가 자연의 이치가 되기 위해서는 특정 인간들만 편리하게 하는 것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게 하려면 자연의 이치를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 애초에 자연의 이치라는 것이 자연에 의문을 가지고 관찰함으로써 여러 다른 경험을 통함으로써 비로소 탄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의 삶을 자유롭게 해 줄 이치인지 의문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다른 민족의 관습을 조롱한 것을 헤로도토스가 문제시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다름’에 대한 자각이 있었던 것이다. 다른 민족은 다른 관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탐구와 경험을 통해 알았던 것이다. 다른 민족은 우리와 같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이 다른 관습을 갖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이다. 그러니 우리와 다르다는 것은 받아들여야 할 사실인 것이다. 우리와 다르다고 조롱하는 것은 그들 민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럴 경우 죽음마저도 불사할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은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역사 속 힘센 자들은 침략의 빌미를 마련하기 위해 그렇게 싸움을 걸기도 했다)

다른 민족의 관습은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어야 한다. 존중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일 것이다. 우리 관습에 비추어 다른 민족의 관습이 ‘다르다’라고 판단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틀렸다’는 가치 판단은 할 수 없는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해 ‘틀렸다’는 가치 판단은 가능하겠으나 다른 민족의 관습이 틀렸다고 조롱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이다. 적어도 그들 민족 내부가 아니라 다른 민족의 입장에서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다른 민족이 아니라 자신들 민족 내부에서라면 다를 수 있다. 민족 구성원들을 불편하게 하여 불행하게 만드는 관습이라면 구성원들이 문제 삼고 바꾸려 할 것이다. 왕의 말씀에 따르는 것이 관습이기도 하지만 잘못된 관습을 바꾸려는 것 또한 역사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오랜 관습이기도 하다. [역사] 곳곳에서 캄뷔세스를 비롯한 악행을 저질렀던 왕들에 대한 반란이 등장한다. 그것은 인간답게 살겠다는 ‘자유’에 대한 외침이다. 법이나 제도는 인간들 사이의 삶의 편리를 위해 만들어진 장치들이다. 그 장치들이 오히려 인간들을 불편하게 하고 억압하는 한 그에 대한 저항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 역사이기도 하다.

저항의 관습에는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자연발생적인 것도 있지만 헤르도토스와 같은 이들도 한몫을 한다. 우리와 다른 관습도 있다는 발견은 우리의 관습을 돌아보게 하고 다른 관습을 꿈꾸게 만든다. 다른 관습이 있다는 것을 경험하는 것 자체가 문제적인 관습에 의문을 제기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이다. 그런 악행(선행)에 대한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역사”이기도 하다.

우리와는 다른 관습에 대해 인정하고 이해하려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관습이 다른 민족에게 해를 끼칠 때 그들 민족의 관습은 그들 내부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자신들의 관습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것으로 존중받겠다면 다른 민족의 관습 또한 그런 것이라고 인정하고 존중해 주어야 한다. 그러지 못할 때 민족 내부의 문제를 넘어 외부의 문제가 된다. 다른 민족을 조롱함으로써 발생하는 외부와의 충돌 문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다시 내부를 문제 삼을 수밖에 없어 보인다. 미친 권력과 그런 권력을 가능하게 한 국민들의 문제를 살펴야 할 것이다. ‘다름’을 존중할 수 있는 국민과 권력의 문제가 그것이다. 나와 다른 것을 존중할 줄 아는 국민들에 의해 탄생한 자신과 다른 국민들의 뜻을 존중할 줄 아는 권력이 다른 민족을 존중할 가능성은 커 보인다. 그런 국민이라면 자신들의 국가권력이 다른 민족의 관습을 조롱하는 일을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다름’에 대한 존중을 망각할 때 ‘다름’이 ‘틀림’이 되는 순간이 발생한다. 다른 민족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의 기준에서 ‘틀렸다’고 평가하여 조롱하는 행위는 ‘틀린 것’ 일 수 있다. ‘틀렸다’는 그들의 판단 자체가 ‘틀린 것’ 일 수 있는 것이다. 외부에서 내부를 틀렸다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틀렸다’는 판단이 그만큼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만일 진정으로 틀렸다고 판단되어 문제 삼는다면 오히려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하려 할 것이다. 특히 그 판단이 강자(권력자들, 다수목소리)의 것일 경우는 더더욱 그러하다. 강자의 기준에 따라 일방적으로 ‘다름’이 ‘틀림’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독재, 파시즘)

다름을 인정하면서 ‘옳음’을 함께 만들어 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각자가 서로 다른 자유로운 인간으로 존중받으며 함께 살아갈 수 있기 위해서 말이다.



l 자유를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자유의 달콤함을 알지 못한다


2,500여 년 전 이집트와 그리스에서 과학과 철학이 태동하던 시대를 살았던 헤로도토스가 ‘역사歷史’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여 역사가 된 ‘history’라는 말의 그리스어 어원 ‘historiai’에는 ‘탐구探究’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조사해서 배우거나 아는 것’, ‘진리나 학문 따위를 깊이 파고들어 연구 하는’것이 탐구의 의미다. 헤르도토스는 ‘역사’의 서문에서 역사를 쓴 이유를 그리스와 페르시아 전쟁의 ‘원인’을 밝히는 것(탐구)이라고 서술하고 있다.5) 인간의 ‘역사’가 전쟁 때문에 시작되었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인간이 쓴 최초의 ‘역사’는 ‘전쟁’ 때문에 탄생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전쟁의 ‘원인’(인과법칙)을 밝히려 하거나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갖게 된 것은 비로소 인간이 ‘생각’(과학적이고 반성적인 사고)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헤로도토스가 헬라스인(그리스인)들에게 최초로 조공을 강요하고 헬라스인들을 노예로 삼았다고 밝힌 뤼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는 페르시아를 침략한다. 퀴로스에게 붙잡힌 크로이소스에게 퀴로스는 사람 착해 보이는데 왜 침략했느냐고 묻는다. 처음에 크로이소스는 신(神)의 뜻이라고 했다가 자신의 잘못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왜 전쟁을 일으켰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했다. 크로이소스는 왜 전쟁을 일으켰을까. 부와 권력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을까. 그렇다면 왜 그런 욕심이 생겼을까. 이후 그리스를 침략했던 크세르크세스 왕이 밝힌 침략의 이유는 이전 왕들의 업적을 계승하고 왕들을 해한 민족에게 복수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르타바노스는 크세르크세스 왕에게 이전 왕들이 패배한 경험과 육지와 바다의 현실적인 상황 판단에 따라 전쟁에 신중하라고 조언한다. 감히 왕에게 그런 조언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왕의 숙부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하지만, 크세르크세스도, 현실에 대한 냉철한 판단을 했던 아르타바노스도 꿈 속에 나타난 조상들의 말을 거역하지 못한다. 헤로도토스는 “관습(노모스)이야말로 만물의 왕”이라는 그리스 시인 핀다로스의 시구는 진실로 옳다는 말로 관습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왕보다도 힘이 센 만물의 왕이 관습이라는 것이다. 크로이소스가 자신이 왜 전쟁을 일으켰는지 알 수 없는 이유는 조상들이 살던 대로 관습에 따라 살았을 뿐 자신의 행위를 돌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왜 그랬는지 한 번도 ‘생각’해 본적도 그럴 필요도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기존의 관습을 자연의 이치로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오랜 시간 다수가 따르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 덕분에 훌륭한 관습이 전통이 되기도 한다. 문제는 악습 역시 자연의 이치로 받아들이기 쉽기 때문에 바꾸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오랜 시간 다수에 의해 통용되어 습관처럼 굳어진 ‘기존의 것’이라는 이유에서 관습은 힘이 센 것이다. ‘악습’이라는 판단 자체가 힘들 수 있으며 ‘악습’이라고 문제 삼는 것은 불온한 소수의 목소리로 묻히기 십상이다.『역사』곳곳에서 캄뷔세스를 비롯한 악행을 저질렀던 왕들에 대한 반란이 등장한다. 그러한 저항은 생각하기 이전에 몸이 반응하는 동물적인 본능이기도 하다. 그러한 본능의 명령에 따라 법이나 제도를 만드는 것은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행위이다. 그러한 제도적 장치들이 오히려 인간들을 불편하게 하고 억압하는 한 그에 대한 저항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역사이기도 하다. 자유를 향한 저항의 관습은 본능적이고 자연발생적이고 사회적이고 역사적으로 형성되며 거기에는 ‘경험’도 깃들어 있다. 우리와 다른 관습도 있다는 발견은 우리의 관습을 돌아보게 하고 다른 관습을 꿈꾸게 만든다. 다른 관습이 있다는 것을 경험하는 것 자체가 문제적인 관습에 의문을 제기하고 변화 시킬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이다. 그런 악행(선행)에 대한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역사’이기도 하다.

그리스와 페르시아 전쟁이 한창이던 전쟁터에서 아테네 자유민이 페르시아 병사에게 “자유를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자유의 달콤함을 알지 못한다.”(6권)고 회유하려 한다. 페르시아 병사가 회유당할 리가 없다. 경험했든 안 했든 자유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자유민이 페르시아 병사에게 했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리스의 자유민들은 자신들이 타인(노예, 여성)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는 사실, 타인에 대한 억압을 통해 자신들이 자유의 달콤함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리스 시대의 자유민들, 오늘날 ‘자유주의자’라고 불리는 어떤 기득권 세력들은 자신들의 자유를 위해 억압받는 이들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아테네 자유민이 말하는 자유는 기존의 관행으로 부터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한 자유는 자기 행위에 대한 성찰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그 성찰이 외적 경험을 통해서 시작되든 아니든 중요한 것은 성찰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역사가 기록하고 있듯이 인류의 시간은 ‘인간의 행위’에 대한 성찰(철학)에서부터 시작되어 그에 대한 과학적인 탐구를 기록(역사)함으로써 그렇게 인류의 시간은 흘러갈 뿐이다. 흘러가는 역사 속에서 기존의 관행을 깨고 자유로워지고 진보하는 것은 흘러가는 역사가 아니라 성찰하는 인간의 몫이다. 성찰을 통해 관행을 깨고 한 발짝 나아가는 것, 그것이 자유와 진보가 시작되는 순간일 것이다. 그리하여, 비로소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인간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던 그리스 시대를 살았던 헤로도토스에게 인간은 조상들이 하던 관행에 대해 자기 성찰할 줄 아는 존재,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갈 줄 아는 존재, 그렇게 자유를 추구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평야를 경작하며 남의 노예가 되느니 척박한 땅에 살며 지배자가 되기를 택했던 것이다.” 『역사』의 마지막 대목이다. 페르시아가 주변 민족들을 정복하면서 제국을 이루어가던 시절 퀴로스 왕에게 신하들은 더 많은 민족을 정복하자고 제안한다. 퀴로스는 그 제안대로 하겠다면 “지배 민족에게 피지배 민족이 될 각오를 하라”는 경고를 한다. 페르시아인들은 그의 말이 옳음을 인정하고 물러났고, 자신들의 견해가 퀴로스의 견해보다 못하자 “평야를 경작하며 남의 노예가 되느니 척박한 땅에 살며 지배자가 되기를 택했다.”는 것이다. 퀴로스 왕의 경고에 따라 어떤 페르시아인들은 다른 민족을 지배하기 위한 전쟁을 벌이지 않았지만, 역사 속에서 어떤 페르시아인들은 전쟁을 벌였고 패하여, 퀴로스의 경고대로 피지배민족이 되기도 했다. 그들 페르시아인들이 살았던. 2,500년여 년 전부터 그 이후의 지금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역사에서 전쟁은 끊이지 않았다. 지배하고 지배당하는 순환의 역사는 반복되었고 반복되고 있고 앞으로도 반복될 것이다.

전쟁의 역사 속에서 헤로도토스는 현자 솔론의 입을 빌어 “복을 가장 많이 타고나고 그것을 끝까지 누리다가 편안하게 죽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쓰고 있다. 솔론이 예로 든 타고난 복은 번성한 나라, 넉넉한 살림, 건강한 몸, 자식 복, 시련을 겪지 않는 것, 잘생긴 외모 등이다. 태어날 때 복을 취사선택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누구에게나 타고나는 복이 있다. 솔론이 말하기를 어떤 이는 타고난 복이 많고 어떤 이는 적을 수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타고난 복의 많고 적음이 곧바로 행복을 결정짓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타고난 복이 많다면 행복할 것이다. 타고난 복이 적은 것을 탓할 수도 있다. 하지만 솔론은 모든 복을 타고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자신이 타고난 복을 어떻게 누리느냐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것이다. 많은 복을 타고나도 모든 복을 가지지 못한 것을 탓하며 더 많은 복을 누리려다 있던 복마저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적은 복을 타고났지만 그 복을 잘 누리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타고난 복도 중요하지만 그 복을 어떻게 잘 누리며 사는가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타고난 복들은 개인의 노력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한 인간이 탄생하기 이전에 주어져 있는 환경, 즉, 한 국가의 구성원들이 만들어 놓은 공동체의 상태와 연관이 있어 보인다. 국민들이 큰 차등 없어 보이는 복을 타고날 수 있다면 더 많은 국민들이 행복할 수 있는 공동체인 셈이다. 솔론의 말대로 타고난 복을 죽을 때까지 누릴 수 있는 공동체이기도 할 것이다. 그에 더해 솔론이 말하는 아름다운 죽음이란 것은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 준 공동체를 위한 희생과 연결된다. 만일 그런 행복한 공동체라면 더 많은 복을 누리기 위해 전쟁을 벌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설사 아름다울지언정 희생을 감당해야 하는 일도 줄어들 것이다. 솔론이 말하는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개인들의 행복을 보장해 줄 국가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국가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불의가 아닌 정의, 예속이 아닌 자유, 세습정이 아닌 민주정, 신의 뜻이 아닌 인간의 의지, 악습이 아니라 지혜가 담긴 훌륭한 관습 등이 뒷받침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조건들이 뒷받침된 국가에 사는 인간들이라면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번영한 국가의 민주적인 정치체제 아래에서 부모와 자식들이 넉넉한 살림 속에서 건강하게, 즉 행복하게 살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ㅣ욕망이 가는 길을 바꾸는


‘좋은 삶’, ‘평등한 삶’을 살려한다면 ‘좋은 삶’, ‘평등한 삶’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좋은 삶’, ‘평등한 삶’을 살고 싶다는 욕망을 일깨워주는 것은 중요해 보인다. 사회 곳곳에 ‘좋은 삶’, ‘평등한 삶’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과 장치들을 마련하는 것은 ‘위험한 세상’의 ‘완충지대’로서,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사는 ‘좋은 삶’으로 가는 교두보가 되어 줄 것이다.

"아, 사람과 이런 관계를 맺을 때 기쁘구나. 다른 이에게 음식을 대접하면 나도 이렇게 기분 좋아지는구나. 다른 사람에게 기대와 인정을 받을 때 더 잘하고 싶어 지는구나. 뮤지컬을 보고, 미술 작품 전시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구나. 친구들과 같이 스포츠를 즐기고 나면 기분 좋은 에너지가 생기는구나. 내가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실천할 때 뿌듯하구나. 내가 읽은 책의 작가를 직접 만나서 궁금한 것을 물어보고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 즐거운 일이구나. 뭐든 구경만 할 때보다 내가 직접 참여할 때 훨씬 보람 있구나."

“나도 좋은 삶을 살고 싶다. 소년이 이런 삶을 원하게 되는 것, 이것이 사회와 사회의 어른들이 소년을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이다. 욕망이 가는 길을 바꾸는 것이 최고의 교정·교화가 아닐까. 소년이 좋은 삶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좋은 삶을 욕망하게 되었으면 좋겠다.”

<소년을 읽다>라는 책의 위 내용 처럼 ‘사람’ 답게 사는 삶이 그러하다면 그렇게 우리가 ‘사람’ 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위하여 ‘나도 좋은 삶을 살고 싶다’는, 좋은 삶을 원하도록 ‘욕망이 가는 길을 바꾸는 것’, ‘좋은 삶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좋은 삶을 욕망하게 하는 것‘, 사회와 사회의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일 것이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사회의 어른일 것이다.

좋은 삶을 경험할 수 있는, 좋은 삶을 욕망하게 하는 좋은 사회는 사회의 구성원들이 스스로 ’ 좋은 사회‘, ’ 평등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의식적인 실천에 의해 만들면서 만들어지는 것이기도 할 테다.

맑스의 말처럼 사랑과 교환할 수 있는 것은 사랑뿐이며, 신뢰를 교환할 수 있는 것은 신뢰뿐이다. 예술을 즐기고 싶으면 예술적인 교양을 쌓은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타인에게 영향을 끼치고 싶으면 실제로 격려하고 원조함으로써 그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당신의 모든 태도는 당신의 현실적이고 개성적인 삶의 특정한 표출, 더욱이 당신의 의지의 대상에 어울리는 표출이어야 할 것이다.

서현숙과 맑스의 견해처럼 인간이 ‘자기 욕망의 주인’으로서, 자기 욕망의 주체가 되어, 자신이 되고자 하는 욕망대로 ‘좋은 사회’, ‘평등한 사회’를 만들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처럼 '좋은 삶', '평등한 삶'을 욕망하는 주체가 되어가는 만큼, 그만큼 ‘좋은 사회’, ‘평등한 사회’를 살아가게 되는 것일 될 것이다.




2026. 3.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