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을 쓰자 53

by 영진

나는 해방을 쓴다. 해방을 위해서 변증법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해방을 위해서 필요조건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변증법적’이라는 표현을 쓰곤한다. 그 표현이 ‘변증법적이어야 한다’는 것으로 읽히는지 왜 변증법적이어야 하는가, 꼭 그래야 하는가는 질문을 받곤 한다. 이미 몇 차례 언급했듯이 변증법은 하나의 틀이지만 고정된 틀이기를 경계하는 틀이기도 하다. 고정된 틀에 고정되지 말 것을 요구하는 것이 변증법이기도 하다. 제1일 원리와 같은 것에 대한 부정이 그런 것이다. 또한, 변증법은 대상과 현실에 대한 관계에서 변증법이라는 틀에 끼워 맞추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 변화하는 대상과 현실을 부단히 따라잡으려 한다. 그러니까, 변증법이라는 틀로 대상과 현실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상과 현실을 부단히 따라가는 운동이 변증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대상과 현실을 계속 따라가면서 그 모순을 들춰내고 한계를 드러내어 넘어서 가게 할 때 변증법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어쨌든, 변증법은 하나의 고정된 틀이 아닌가, 대상과 현실을 따라가기만 하는데 어떤 의도된 변화를 야기할 수 있는가, 모순을 들춰내야 하는가, 한계를 드러내야 하는가는 그런 물음들이 있는 것이다. 대상과 현실을 따라가다 보니 그와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 변증법이기도 하다. 대상과 현실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과 현실이 틀 속에서 틀을 넘어서 가고 있고, 모순을 부정하려 함으로써 모순이 발생하기도 하고, 한계에 이르게 됨으로써 한계가 드러나기도 하는 그와 같은 대상과 현실을 변증법은 따라잡아 보여주는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대상과 현실을 충실히 따라가다 보면, 그렇게 충실히 따라갈 때, 드러난 모순, 드러난 한계를 통과해 가고 있다면 가게 된다면 그러한 대상과 현실의 양태를 변증법적이라고 부르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해방을 쓰기 위해 나는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ㅣ다시 사유


ㅣ사유는 늘 잘못된 것일 수 있다

대상에 대한 사유는 늘 잘못된 것일 수 있습니다. 사유를 통해서 풍부한 대상의 일부를 파악하여 언어로 개념화한 것을 마치 대상 전체와 동일한 것처럼 여길 경우, 더 나아가 대상을 고정불변의 영원한 것으로, 대상에 대한 개념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경우,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해서, 대상에 대한 사유는 늘 ‘결여와 오류’라는 문 앞에 활짝 열려 있다는 사실, 대상에 대한 사유는 늘 부분적이고 상대적으로만 옳을 수 있다는 사실, 사유의 대상에는 사유하는 자신도 포함된다는, 즉, 대상에 대한 자신의 사유가 대상에 적합한 것인지도 사유해야 한다는 사실, 대상은 무궁무진하며 가변적이기 때문에 완전하고 완결된 사유는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ㅣ상대적으로는 절대적으로 옳을 수 있다

사유는 대상을 알아갈 뿐이라는 점에서도, 변화하는 대상을 따라갈 뿐이라는 점에서도, 대상에 대한 사유가 옳은 것인지를 묻는 진리나 진실에 대한 논란은 늘 존재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특히, 서로의 이해관계가 얽힌 경우는 더욱 그렇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대상에 대한 자신의 사유가 절대적이고 보편타당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의문스러운 것이기도 합니다. 누구나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겠습니다. 그처럼 모두가 옳을 수 있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는 절대적으로 옳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모두가 절대적이고 완전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 진리는 말할 것도 없고 안다는 것 자체가 부정되기도 합니다. 진리도 아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식으로 부정하지 않으려면 아는 것도, 진리도 부분적이고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ㅣ부단히 알아가고 보편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 인류의 진화 과정이다

대상에 대해서 알아낸 만큼은 아는 것이고, 그 만큼에 근거해서 진리나 진실에 대해서 사유하면 될 것인데, 자신이 아는 것만이 아는 것이고 자신만이 진리라고 주장할 경우 ‘다시’ 사유할 것을 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유는 완전할 수 없지만 완전한 앎을, 절대적일 수 없지만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부단히 알아가고 보편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 고정되고 완결될 수 없는 인류의 진화 과정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미지의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인류가 진화하고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대상을 부단히 알아가기 위해서, 보편타당한 것을 추구하기 위해서 사유에 늘 존재하는 ‘결여와 오류’를 수정하고 보완하기 위해서, ‘다시’ 사유하려는 자세는 중요해 보입니다. 관찰하고 실험하는 과학적인 사유, ‘성찰’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자세입니다.


ㅣ대상과 사유는 상호작용하며 함께 변해간다

사유도 대상의 일부라는 점에서 사유를 통해 대상의 변화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사유와 대상은 별개일 수 없습니다. 서로 상호작용하며 함께 변해간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대상의 변화를 사유하면서 사유를 대상에 맞추기도 하지만 변화를 예측함으로써 대상의 변화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사유가 대상을 형성하기도 합니다. 그럴 경우에도, 대상과 대상이 변화하는 역사적인 과정, 즉, 시간의 흐름 속에서 대상과 사유의 상호작용에 의해 생성, 변화, 발전하며 형성된 사회적 조건에 대한 사유에 근거할 때 인류에게 이로운 대상과 사유를 형성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ㅣ관리되는 사회라는 ‘관념’


ㅣ관리되는 사회

아도르노는 자신이 살았던 1960년대 서구 사회를 총체적으로 관리되는 사회로 규정합니다. 관리되는 사회에는 서독 및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사회뿐만 아니라 동독 및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사회 모두 포함됩니다.

아도르노가 관리되는 사회라고 규정하는 근거에는 동일성 사유에 따른 동일성 원리가 있습니다. 즉, 자본독점, 권위주의, 관료주의에 반反하는 것들은 쓸모없는 것, 틀린 것, 불온한 것으로 간주되어 배제와 억압의 대상으로 관리되는 것입니다.


ㅣ동일성 속의 차이, 차이 속의 동일성

그런 이유에서인지 아도르노는 동일성 사유를 따를 때 늘 남겨져 존재할 수밖에 없는 ‘비동일자’를 더 중요하게 여기거나, 동일자보다 비동일자를 더 본질적인 것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그처럼 아도르노의 변증법적 사유는 대상을 ‘동일성’이나 ‘비동일성’의 일면이 아니라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동일성’으로 파악하려고 하거나, ‘동일성 속의 차이, 차이 속의 동일성’을 파악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대상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려는 사유의 운동이기도 합니다.

또한, 아도르노의 변증법적 사유는 관리되는 사회를 유지하는 근거가 되는 동일성 사유나 도구적 이성에 대해 비판합니다.

하나의 ‘제일원리’로부터 전체를 파악하려 하거나, 대상의 변화를 보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실증주의’적으로 파악하려 하거나, 대상들의 관계를 보려 하지 않고 각각의 위치만 파악하는 ‘위상학적 사유’, ‘사회적 통념’이나 ‘기존의 틀’을 무반성적으로 따르는 ‘고정관념’, 자연과 사람을 도구화하는 도구적 사유 등이 그것입니다.


ㅣ사태 자체에 다가갈 자유

그처럼 아도르노의 변증법적 사유는 동일성 사유의 폭력을 넘어서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변화하는 대상을 부단히 따라잡으려는 사유, 그 사유에 대해서도 반성하는 사유, 아도르노의 촘촘한 ‘미시론적’ 사유는 무엇보다 ‘사태 자체’에 충실 하려는 사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아도르노는 ‘사태 자체에 다가갈 자유’를 강조합니다. ‘동일성 사유’의 틀에 갇히지 않을 자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총체적으로 관리되는 사회 내에서 사태 자체에 다가갈 자유는 어디까지 어떻게 확장될 수 있는 것인지 물음을 갖게 합니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을 ‘관리되는 사회’라고 규정한 아도르노의 변증법적 사유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도르노의 변증법적 사유에 따르면 ‘관리되는 사회’라는 ‘동일성 사유’는 부분적인 사유일 뿐입니다. 해서, 현대 사회를 ‘관리되는 사회’로만 파악한다면 ‘동일성 사유’에 빠져있는 변증법적이지 못한 사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변증법적인 사유인 한, ‘관리되는 사회’의 비동일자라고 할 수 있는 ‘관리되지 않는 사회’를 동시적으로 사유할 수 밖에 없으며, ‘관리되는 사회’라는 사회의 성격도 고정불변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의 실천적 작용에 따라 변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ㅣ자유는 그저 주어지지 않습니다

아도르노가 ‘관리되는 사회’에 대한 ‘내재 비판’을 통해 관리되는 사회의 한계를 드러내 보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관리되는 사회가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지는 않을 것입니다. 관리되는 사회를 유지하려는 지배관계를 변혁할 실천이 뒤따라야 할 것입니다.

아도르노가 사태 자체에 다가갈 자유를 강조하지만 사태 자체에 다가가려는 자유가 발현되는 것에는 많은 제약이 따릅니다. 자유는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유의 자유도 마찬가지고 사태 자체를 조금이나마 자유롭게 변혁하기 위해서도 크고 작은 변혁적 실천에서부터 생사를 건 투쟁에까지 이르기도 합니다.

아도르노에게 ‘변증법적 사유를 넘어선 변혁적 실천’으로 무엇을 했는지 묻곤 합니다. 엘리트라는 물적 토대(유복한 가정환경, 대학 교수)가 ‘지배하고’, ‘관리하는’ 기득권 쪽에 가 있지 않았나 비판받기도 하고, 운동가가 아니라 이론가 아닌가, ‘아우슈비츠라는 충격적 경험’이 변혁적 실천에 대해 체념하게 만들지 않았나 이해받기도 합니다.


ㅣ'자유의지'는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사태 자체’에는 사유 주체들의 사유와 행위도 포함됩니다. 그리고, 어떤 사태 자체, 어떤 사회를 살아가고 싶은지를 결정할 ‘자유의지’, 사태 자체에 다가갈 자유를 넘어 사태 자체를 변혁할 ‘자유의지’, 자신의 의지에 따르는 그 ‘자유의지’는 누구에게나 존재한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입니다.



ㅣ사유의 힘, 사유의 함정


ㅣ사유의 힘은 제법 세다

사유와 실재는 다르다. 사유가 곧 실재는 아니라는 것이다. 사유가 실재를 만들기도 하고, 사유는 실재가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사유와 실재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사유와 실재는 상호 작용하며 서로를 만든다.

사유가 실재를 만들기도 한다는 것에, 사유가 실재의 반영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에, 그럴 여지가 있다는 것에, 사유가 실재로부터 그만큼의 자율성을 지닌다는 것에, ‘사유의 힘’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힘을 발판 삼아 사유는 실재를 바라는 모습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유의 힘은 제법 세다고 할 수 있다. 실재가 ‘사유하기 나름’인 것은 아니지만 사유하는 대로, 사유하는 만큼 실재를 만들 수 있는 여지는 있다는 것이다. 그럴 때 중요한 것이 실재가 실제로 어떠한지 파악하는 것일 테다.

부단히 변화하는 실재를 따라잡으며 파악할 때, 그런 가운데 실재의 운동 법칙이나 변화 경로를 파악할 때 실재를 사유가 바라는 대로 만들어가기 수월할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실재에 대해 사유가 파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ㅣ파악한 만큼은 파악했다

애초에 실재에 대한 사유의 파악은 ‘불완전, 불명확,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유의 파악’이 문제 되거나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을 수도 있다. ‘완전한, 명확한, 확실한’ 파악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조차 ‘불완전, 불명확, 불확실’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 명확, 확실’하지 않다고 해서 실재에 대한 모든 파악이 잘못된 것, 틀린 것일 리는 없을 것이다. 잘못된 것, 틀린 것이라는 파악도 마찬가지로 완전, 명확, 확실하지 않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서, 어떤 사유든 파악한 만큼은 파악했다고 주장할 수 있으며 파악된 것의 절대적 아닌 상대적 완전, 명확, 확실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만큼의 완전, 명확, 확실을 두고 옳고 그름을 논할 수 있는 것이다.


ㅣ실재에는 자신의 사유도 포함된다

그러한 논의(논쟁) 가운데 자신의 파악이 옳다고 주장하는 기준들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사유와 실재 사이의 일치 여부, 정합성 정도, 혹은 파악된 것의 현실성(현실적인 의미, 힘, 이익 등) 등이 있다. 그럴 경우에도 기준이 되는 것은 ‘실재’일 수밖에 없다. 사유 자신이 포함된 실재 말이다.

‘실재’에 대한 사유들이 ‘실재’에 대해 파악한 것들을 두고 논의하며 합의에 이르면 좋겠지만, ‘이익과 권리’ 앞에서 대립하고 충돌할 수 있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실재’가, 그들 사이의 ‘이익과 권리’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유’가 첨예하게 충돌 할 경우 ‘사유의 함정’에 빠지기도 한다. 실재는 알 수 없다며 자기가 아는 것도 부정하는 ‘불가지론’, 자신은 ‘중립’이라며 자신 없이 지배적인 사유를 따르게 되는 사유, 모든 사유가 똑같이 옳다는 ‘상대주의’의 사유, 실재를 자기와 무관한 듯 ‘있는 그대로’ 파악한다는 ‘실증주의’의 사유 등이 그렇다.

이들 사유가 ‘함정’에 빠졌다고 하는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 ‘실재에는 자신의 사유도 포함 된다’는 사실, 심지어 자신의 사유에 따라 ‘실재가 변하여 만들어지기도 한다’는 사실을 부정한다는 것 때문이다. 그러한 사유는 자신의 현실성(현실적인 의미, 힘, 이익 등)을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l 자신이 바라는 실재를 만들어가는 것

자신을 만드는, 자신이 만드는 실재 속에서 자신의 위치와 의미를 파악하지 않으려는, 실재 속의 자기를 부정하는 사유는 실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사유가 된다. 실재를 자신들의 ‘이익과 권리’를 위해서 사유하는 ‘자본주의국가권력 및 기득권 세력’이 바라는 사유이기도 할 것이다.

‘불가지론’, ‘중립’, ‘상대주의’, ‘실증주의’의 사유에서처럼 실재에서 자신을 부정하는 사유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사유의 힘’에 따라 ‘실재’를 파악하며 실재 속의 자신을 부정하지 않으며 자신이 바라는 실재를 만들어가는 것일 테다.




2026. 3.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