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해방을 쓴다. 자본주의 국가, 민주국가, 사회주의 국가, 사회민주주의 국가, ‘국가‘ 앞에 여러 수식어가 붙는 것은 국가가 가진 권위주의적이고 관료주의적인 폭력적 성격 때문일 것이다. 그 때문에 국가 폐지를 주장하는 무정부주의자들도 있지만 나의 경우는 국가의 성격이 문제라고 보는 편이다. 국가가 아니더라도 인간들이 모여 살기 위해서는 조직을 이루지 않을 수 없고 어떤 조직이든 기존의 ’국가‘가 가지고 있는 부정부패하고 폭력적인 권위주의와 관료주의의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조직의 규모나 크기에서 국가가 가진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폭력성을 넘어서기 위해 소규모 공동체 조직을 지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 소규모 공동체로 어떻게 이행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발생한다. 더군다나 오늘날과 같이 미국과 트럼프 대통령이 보여주고 있듯이 자신들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서 극단적인 행동을 서슴치 않는 제국주의 시대에 국가 폐지를 주장하는 것은 먼 훗날의 일로 보인다. 지금은 국가 아닌 공동체로 가기 위해서라도 현재의 국가조직을 통해 생존하는 가운데 민주적인 국가로, 사회주의적인 국가로 이행해 가는 것이 우선이겠다. 그런 점에서 자신의 국가에서부터 만국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성격을 노동자들에게 민주적이고 평등하게 형성해 가는 것이 지금은 중해 보이는 것이다.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해방을 쓰기 위해 나는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ㅣ자본주의와 민주주의
맑스의 『자본』을 다시 읽으며 사이토 고헤이와 홍승용은 지속 불가능한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탈성장 코뮤니즘’(사이토 고헤이)과 ‘노동자국가’(홍승용)가 그것이다. 그들이 자본주의를 넘어서 가려는 목적지는 달라 보이지 않는다. 맑스가 “노동에 대한 경제적 해방이 이루어질, 궁극적으로 발견된 정부 형태”라고 규정했던 ‘파리코뮌’이 그것이다.
그런데, ‘코뮌’이라는 목적지는 같을지라도 그곳으로 가는 길(방법)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즉, 맑스는 ‘파리코뮌’에 대해 “국가의 모든 기능이 코뮌으로 이양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는데 ‘국가에서 코뮌’으로 ‘어떻게’ 이양할 것인가라는 ‘방법’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다.
홍승용의 방식이 현재하는 ‘자본독재국가’에서 ‘노동자국가’로, ‘노동자국가’에서 ‘코뮌’으로 지양해 가는 과정을 통해서 ‘국가’가 사멸하도록 하려는 것이라면, 사이토의 방식은 사회를 ‘코뮌’화 함으로써 ‘국가’를 폐지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홍승용은 ‘노동자국가’를 통해서 ‘생산수단을 국유화’함으로써 ‘풍요로운 평등사회’로, 사이토는 ‘생산수단을 사회화’함으로써 ‘커먼’으로서 민주적으로 관리함으로써 ‘탈성장 코뮤니즘’으로 이양해 가겠다는 것이다.
그들의 차이를 결정짓는 것은 ‘국가권력’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사이토는 ‘국가권력’ 자체가 민주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국가’에 의존하는 방식을 경계한다. 그럴 경우, 사이토의 ‘코뮌’들이 전 지구화한 자본독재국가권력에 흡수되지 않을 수 있는지가 문제시된다. 그런 점에서 홍승용은 국가권력을 획득하여 ‘자본독재국가’를 ‘노동자국가’로 국가의 성격을 바꾸어 가는 과정 자체가 ‘코뮌’으로 가는 과정으로 여긴다. 그런 점에서, 과정으로서의 ‘노동자국가’가 ‘자본독재국가’와 달리 ‘민주적’일 수 있는지가 문제시된다.
ㅣ인정 망각
루카치와 아도르노가 공통으로 지적하는 주체의 수동적인 태도 못지않게 호네트의 논의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사물화가 야기하는 심각한 결과는 개별 주체들의 상호무시와 적대적인 관계이다. 즉, 사회적 존재로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 서로 무관한 듯 무관심과 냉담함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즉, 상호 인정이 아니라 상호 무시가 지배적인 주체들의 태도가 되어가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행위, 아니 존재 자체가 이미 대상(자연, 타자, 자기 내면)을 전제로 하는 행위라고 했을 때, 대상의 객관화, 즉, 사물화의 특징으로서 수동성 및 ‘정관적’ 태도의 또 하나의 측면으로 지적된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바라만 보는 태도 역시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대상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위한 ‘거리두기’로서의 객관화와 대상을 지배와 조작의 대상으로 전락시켜 서로의 관계를 적대시하도록 만드는 사물화는 구분되어야 한다. 이러한 구분에는 나 스스로가 조작과 지배의 대상이 되어 무관심과 억압 속에서 살아가고 싶지 않다는 뼈저린 현실 인식과 역사 인식이 필요하다.
그런 이유에서 호네트가 개별자들의 적대적인 관계를 극복할 방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각기 정서적 존재로서 타인을 유일무이한 존재로 인정하는 ‘사랑’이나, 각기 개성적 존재로서 타인을 공동체의 가치 있는 구성원으로 인정하는 ‘사회적 연대’는 중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사랑’과 ‘연대’가 실현되기 위해서라도 인정 주체들의 관계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사소한 경제적 이해관계나 계급적 대립, 권력다툼 앞에서 인정에 대한 논의가 무기력해지는 현실을 우리는 자주 접하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호네트의 논의는 자칫 지배자들의 논리에 매몰될 가능성이 늘 존재한다는 점도 문제적이다. 즉, 현재의 (지배) 상태를 인정하라는 인정테제는 지배력을 위해서 더없이 유용해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각자의 고유성에 대한 상호 인정을 망각하도록 만든 현실이야말로 그 인정이 무엇에 대한 어떠한 성격의 인정인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즉, 자본가와 노동자 각자의 계급 내부에서는 사랑과 연대의 가능성은 늘 열려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인정 망각을 야기한 원인이 계급 갈등과 지배를 위한 폭력적인 야만성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계급 갈등과 야만적인 폭력성을 넘어 사랑과 연대를 실천하기 위해서라도 계급 갈등과 야만적인 폭력이 사라진 사회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래서, 잊어버린 인정에 대한 기억을 되찾는 일보다 중요한 것이 차별 없이 더불어 살아가고 싶어 하는 이들의 작은 욕망을 무참히 짓밟는 불평등 구조를 면밀히 파악하고 지양해 나가는 일이다. 물론 인정과 사랑과 연대의 공간은 주체들의 노력에 의해 늘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공간을 파괴하려는 또 다른 지배 주체들의 노력 또한 늘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인정의 공간을 만들어가는 노력과 그러한 공간을 파괴하려는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은 늘 함께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인정과 사랑의 평등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경우, 주체들이 모두 똑같이 인정을 받아야 한다며 인정의 평준화를 요구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오히려 유일무이한 존재의 고유성을 무시하는 태도일 수 있다. 형식적인 평등에 대한 요구는 획일화의 도구가 될 뿐이다.
그래서 진정한 인정은 차이 속의 인정일 수밖에 없고, 인정을 위한 투쟁 또한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차이에 대한 인정의 과정 속에서 자신만의 고유성을 인정받으려 함으로써 행하는 폭력은 줄어들 것이며, 인정의 공간을 만들기 위한 희생의 불가피성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한 인정의 과정 속에서만 진정 상호 인정을 바탕으로 한 사랑과 연대의식이 싹 틀 수 있을 것이다. 상호 인정을 통해 동일성을 확보함으로써 연대의식을 싹 틔우되 그 동일성 속에서 차이를 인정해 주는 태도가 필요한 것이다.
주정립은 호네트의 ‘인정투쟁 모델’이 이데올로기 비판의 관점에서 공백을 드러낸다고 적절한 지적 한다. 호네트의 주장처럼 정의롭지 못한 상태에 대한 인식이 저항의 출발점이라고 할 때, 과연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일상적 의식이 어떻게 정의롭지 못한 상태를 인식하고 저항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주정립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범주는 자본주의의 일상적 행위자들이 필연적으로 받아들이는 의식 형태로서 왜곡된 현실 인식의 토대를 이룬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의 한 형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경제적 범주들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상의 의식이 지배하는 한, 그 이면에 은폐된 착취 관계는 그 무엇보다 근원적인 사회적 부정의의 원인임에도 저항의 대상 범위에서 비켜나게 된다는 것이다.
호네트에게 이데올로기적 의식형태가 부정의의 근원 인식 및 그에 대한 저항의 전망과 관련해 초래할 수 있는 근본적 제약에 대한 문제의식이 부재하는 한, 그의 인정투쟁 모델이 저항의 가능성과 조건에 대해 지니는 이론적 역량 역시 그만큼 제한된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정립이 말하는 이데올로기는 ‘경제적 범주’(임금, 지대, 지대를 통한 은폐된 착취관계)인데, 그렇다면 그러한 경제적 범주 속에서 살아가는 대중들은 그러한 ‘경제적 범주’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착취 관계를 인식할 수 없게 된다.
다시 말해, 경제적 범주 자체가 인식을 방해하는 요인이라면 경제적 범주가 변화되지 않는 한 대중들은 영원히 그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관계 변화는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생산력의 발전을 믿으면 될 것인가? 호네트가 자본주의의 착취 관계에 대한 인식을 소홀히 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주정립의 문제 제기는 타당하다.
하지만 호네트가 제기하고 있는 도덕적 규범으로서의 부정의에 대한 저항은 노동력을 착취하는 자본 권력에 대한 비판이라는 측면에서도 ‘인정’을 통한 사물화 극복을 위해 중요한 문제제기일 것이다.
ㅣ민주주의와 평등
한국어 사전에 따르면 ‘민주주의民主主義’는 “국민이 권력을 가짐과 동시에 스스로 권리를 행사하는 정치 형태”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대한민국의 헌법 1조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민주주의라는 정치 형태’를 따르는 ‘민주공화국’이라고 할 수 있다.
‘형태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로도 대한민국이 민주주의라는 정치 형태에 따른 ‘민주공화국’인지는 다른 문제일 것이다.
그러니까, 대한민국이 형태상으로는 국민이 주권자라는 것이고 실질적으로도 그렇기 위해서는 그럴 수 있도록 주권자들이 권리를 행사해야/행사하면/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겠다. 헌법에서 말하는 ‘국민’은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에 해당할 것이다.
그 말은 ‘모든 국민’이 주권자로서 “권리나 의무, 신분 따위가 차별이 없이 고르고 한결같음”이라는 ‘평등平等’의 한국 말 뜻대로 ‘모든 국민’이 ‘차별 없이’ ‘평등’해야 대한민국이 형태상의 민주주의이며 헌법상의 민주공화국이라는 말이겠다.
나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말을 대한민국은 ‘모든 국민이 차별 없이 평등해야 한다’ 는 말로, ‘모든 국민’이 ‘평등하지 않다면’ 대한민국은 민주주의라는 정치 형태만 따를 뿐 ‘민주 공화국’은 아니라는 말로, 이해한다.
2026. 3.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