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해방을 쓴다. 고통에도 순서가 있을까. 누구의 고통이 가장 클까. 누구나 자신의 고통이 가장 크다고 말해도 무어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감히 타인의 고통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고통의 크기나 다수가 공통적으로 겪는 고통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고통을 없애나가기 위해서일 것이다. 누구도 아무런 고통이 없는 세상을 만들기는 쉽지 않겠지만 지금 여기에서부터 가능한 한 고통을 없애거나 줄여나가는 일은 사회구성원들의 의지에 달린 문제일 것이다. 공공연한 구조적 위계에 따른 폭력에서부터 은밀한 가정 내의 폭력까지 고통을 야기하는 사회 문제들에 대한 법제도화도 필요하겠고 고통받는 이들의 목소리가, 고통을 말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더 많은 목소리가 필요하겠다.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해방을 쓰기 위해 나는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ㅣ삶과 죽음
나는 죽음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 말은 삶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것으로 나는 받아들인다. 또한, 삶을, 죽을 만큼 죽을힘을 다해 치열하게 살지 않았다는 것으로도 나는 받아들인다. 살아남기 위해서만 아니라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도 죽을 힘을 다해 치열하게 살지 않았다고도 나는 받아들인다.
그런 점에서 나는 죽음에 대해서,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워하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감히 할 말이 없다. 그러니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한다. 그럼에도 잘 알지도 관심도 없는 삶과 죽음에 대해서 내 생각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럴 때, 무언가에 관심을 가지고 생각하고 내 생각을 드러내는 행위를 할 때 비로소 나는 살아 있는 것인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게 치열하지 않지만 때때로 무언가에 관심을 가지고 생각하고 행위 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종종 내가 살아 있는 경험을 한다. 다만 그 행위의 강도가 그렇게 강하지 않다고 치열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내가 죽음에 대하여 관심이 크지 않은 것은 그런 까닭일 수 있다. 내가 살아 있는지 알지 못하겠기 때문이다. 나는 살아 있는가.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무언가에 관심을 가지고 생각을 드러내는 행위를 하고 있는가.
ㅣ공통의 고통
불운한 시대에 불운한 사회에서 불운한 신분으로 태어난 불운하게도 나약한 한 개인의 문제로 ‘차별’을 지우기는 어렵지 않다. 그렇게 차별은 아래로 낮은 곳으로 보이지 않는 곳으로 희생자들을 흘려보낸다. 보이는 듯 보이지 않는 아는 듯 모르는 듯 차별은 사회 곳곳에 스민다. 알 필요가 없기에 알려하지 않는 권력의 차별을 알지 못하면 나도 모르게 차별받다 차별하게 된다. 그런 사회에서 나 자신을 사랑하려 해도 쉽지 않겠지만, 너만 그런 게 아니라는 말이 위로가 되지도 않겠지만 자신을 보듬는 사랑도 하고 서로 위로도 하려 애써야 할 것이다. 권력을 넘어 차별의 폭력이 없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 그렇게 함께 살아 있어야 할 것이다. 살아있어야 자신의 폭력을 알 필요가 없는 이들에게 그들의 폭력을 알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차별이라는 폭력이 조금씩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도 모르게 차별의 폭력을 저지르는 이들을 방지하기 위해 최소한의 법과 제도가 도움이 될 것이다.
“뭐가 폭력인지를 설명하는 게 굉장히 오래 걸려요. 설득을 해야 되고 그 과정에서 피해자가 엄청 지치거든요. 근데 법안에서 이야기를 정해준다면 너무 좋겠다는 생각을 진짜 많이 했었어요.”(한국인 여성)
법은 사회를 유지하는 최소한의 장치일 뿐이다. 법이 차별을 야기하는 근원을 해소할 수는 없다. 하지만 폭력을 방치하지 않고 방지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 마저 없다면 차별이라는 폭력은 권력 유지를 위한 수단이 될 것이다.
약자들의 목소리를 들어주고 보호해 주기 위해서 정부가 있고 법과 제도가 있는 것인데 정부와 법과 제도가 힘 있는 자들의 목소리만 듣는다면 약자를 위한 법과 제도를 만들지 않을 것이다. 정부가 사회의 약자를 보호해주지 않는다면 정부도 사회도 없는 것이다.
“성별, 장애, 나이, 언어, 출신국가, 출신민족, 인종, 국적, 피부색, 출신지역, 외모, 혼인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형태,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전과,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학력, 고용형태, 병력 또는 건강상태, 사회적 신분”
한국인들이 겪었다는 차별의 요인들이다. 각자의 처지가 다른 상황에서 고통의 우위를 가릴 수는 없는 일이다. 차별에 따른 고통이라면 남의 고통보다 자신의 고통이 더 크게 느껴질 수 있다. 또한 자신이 당하는 폭력은 쉽게 알아차리지만 자신이 가하는 폭력은 알기 어려울 수 있다.
그처럼 차별이라는 폭력은 폭력을 모르는 폭력이 아닌가 생각한다. 모두가 모두의 차별과 고통을 챙겨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나보다 더 큰 고통, 모두가 겪는 공통의 고통에 대한 생각도 하면서 서로의 고통을 챙겨가야 할 것이다.
ㅣ민주주의의 확장
‘민주주의의 죽음’을 말하는 지금, 이 순간. 나의 관심은 ‘민주주의의 확장’에 있다. 마침, 랑시에르가 <문학의 정치>라는 책에서 그런 뉘앙스로, 즉, 자신은 민주주의를 확장하고 있다는 것과 같은 식으로 말씀을 하고 계시다. 저명한 지식인의 말씀이라 적당히 넘길 수 없다. 그분들의 말씀이 곧 권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권력이 말이 되고 말이 사회의 공기가 되고 언론이 되고 상품이 되고 권력이 되고 자본이 되고 되고 되어 그렇게 되고 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민주주의를 확장한다면 반길 일 아닌가. 그렇다면 ‘확장’의 의미를 물어야 하겠다.
‘문자’의 민주주의를 통해 말하지 못했던 이(것)들이, 글 쓰지 못했던 이(것)들이 말을 하고 글을 쓸 수 있는 ‘문학의 정치’가 민주주의를 확장시켰다니, 문학을 통해 민주주의가 확장될 수 있다니 반길 일이다.
그들이 말하지 못했다는 것, 글 쓰지 못했다는 것 자체가 민주적이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말하기와 글쓰기가 민주주의의 확장을 의미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민주적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내용적으로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까.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하는 말이다. 그렇게 묻고 보니 민주주의의 내용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어떤 목소리도 글쓰기도 배제되지 않는, 모든 목소리와 글쓰기를 포괄하는 것은 민주적인가라는 것이 나의 물음이다. 어떤 목소리도, 글쓰기도 배제하지 않으려는, 모든 목소리와 글쓰기를 포괄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하지만 포괄=민주, 배제=반민주. 이런 식으로 이분법적으로 공식화하는 것은 반민주적인 태도라고 여긴다. 현실에서 모두를 포괄하거나 모두를 배제하는 경우는 없다. 상대적으로는 얼마든지 민주적일 수 있고 또한 상대적으로는 얼마든지 반민주적일 수 있는 것이 현실일 뿐이다. 반민주주의가 민주주의 행세를 하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그런 ‘현실’을 인정하는 자세도 중요하겠고 민주주의를 민주화하겠다는 자세로 서로 민주적이기를 요구하는 것은 늘 필요하다. 그 요구의 목소리와 글쓰기는 그런 행위를 할 수 있다는 형식적 차원을 넘어 지금껏 말하지 못하게, 글 쓰지 못하게 했던 지배 권력이 누구인지 분별하고, 그 지배 권력을 향한 말과 글이 포함되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신의 목소리일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주인 되는, 내용적으로도 민주화하는 길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 때, 형식과 내용이 모두 확장될 때, 비로소 민주주의는 확장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죽었을지도 모르는 민주주의를 살리는 길일 것이다.
2026. 3.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