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해방을 쓴다. 내가 쓰는 해방이 나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모두를 위한 해방을 지향하기도 하지만, 내가 쓰는 해방은 나의 기준에 따른 것일 뿐이다. 그런 이유에서 내가 나의 해방을 쓰듯이, 각자의 해방은 자신이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만, 함께 우리의 해방을 쓸 수는 있을 것이다. 각자 함께 우리 모두의 해방을 써야 할 것이다. 여성도 장애인도 비이성애자도 권력도 아닌 남성인 내가 무슨 해방을 쓴다는 것일까. 내가 쓰는 해방이 누구에게 가 닿을 수 있을까 스스로 묻기도 한다. 그럼에도 누군가의 해방에 보탬이 되기를 바라며 또한 누군가의 해방에 방해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나는 해방을 쓴다. 인간 해방, 자연 해방, 노동 해방을 쓴다. 무엇보다 나의 해방을 쓴다.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해방을 쓰기 위해 나는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ㅣ소박한 삶
지금 지구상에서 가장 뜨거운 인물은 미국의 대통령 트럼프일 것이다. 지금 한국에서 나의 이목을 끄는 인물 중에는 전 국정원 직원이었던 홍장원씨가 있다.
‘부, 권력, 명예’보다 ‘소박한 삶’을 지향하는 나에게 트럼프와 홍장원씨의 삶이 큰 관심사는 아니다. 다만, 홍장원씨의 삶이 이목을 끄는 것은 그의 삶 자체라기보다 주변 사람들과 대비되는 그의 삶 때문인 듯싶다.
육사 출신으로 군 장성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국가에 더 헌신하고 싶어서 대북 공작 블랙 요원의 길을 선택했고, 조국을 위해 전투하다가 전사하는 게 자신의 꿈이었다는 홍장원씨의 삶이 진급을 위해 계엄에 동조한 일부 군인들, 자신의 기득 권력을 지키기 위해 내란을 일으키고, 그에 동조하며 국민들을 선동하고, 헌법을 준수하기는커녕 헌재마저 부정하려 드는 정부 관료, 정치인, 법조인들의 삶과 대비되는 것이다.
일부 군인들, 정부 관료, 정치인, 법조인의 경우 이제껏 한국 사회에서 흔히 봐왔던 삶이라고 한다면, 홍장원씨의 삶은 흔히 볼 수 없던 삶이어서 도드라져 보이는 게 아닌가 싶다.
새삼 '소박한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요즘이기도 하다.(2025.2.25.)
ㅣ무해한, 최소한
'한 달에 한 번만 잊지 말아줘' 2025년을 시작하면서 에피톤프로젝트의 ‘선인장’의 노랫말처럼 한 달에 한 번만 잊지 말아 줄 것들을 떠올리고 있어.
‘무엇은 쓰고 무엇은 안 쓸 것인가, 무엇은 말하고 무엇은 안 말할 것인가’, ‘무엇은 하고 무엇은 안 할 것인가’ ‘인지상정이고 사필귀정이다 침소봉대하지 말고 일희일비하지 말고 역지사지하고 화이부동해야지’ ‘불가능해 보이는 인류애에 기반한 평등한 세상을 실현하려 애쓰며 살아가는 이들이 있지. 그들을 잊지 말아야겠어’ '몸과 마음에 힘 빼고 가볍게, 머리에 힘 빼고 단순하게' '하려던 일들 잘 하고 있으니 '담대하게' 밀고 가'
지난 2월, 3월, 4월, 5월, 6월에 떠올렸던 잊지 말아 줄 것들이었지.
어느새 또 한 달이 지났어. 지금 이 ‘순간’ 한 달에 한 번 잊지 말아줘야겠다 떠올려지는 것에는 ‘무해한’이라는 말이 있어. 말은 하되 글은 쓰되 보이지 않게 들리지 않게 더 작아지라고
네게 유익한 사람이 아니라 네게 무해한 사람이고 싶다고 어느땐가 나에게 하곤했던 말이야. 잊지 말아줘야겠어.
8월에 잊지 말아줄 것으로 ’최소한의 삶‘을 떠올린다. 7월에 떠올렸던 ’무해한‘ 삶을 살기 위해서 최소한의 삶이 필요하다고 본다. 최소한이 최대한이 되는 삶의 지혜가 필요하다고 본다. ‘최소한의 삶‘이 한 개인의 삶의 방식에 그치지 않고 모두에게 이로운 사회를 위한 삶의 방식일 수 있다고 본다.
이미 사람들이 여러 형태로 살아냈고 살고 있고 살아야 할 삶의 방식이 아닌가 싶다. 나 역시 2015년 경부터 관심을 가졌고 요즘 부쩍 생각이 난다. 한 달에 한번만 잊지 말아 줘야겠다.
그와 같은 삶의 방식만으로 전 지구를 집어삼키고 있는 ’기후, 전쟁, 경제‘ 위기를 넘어설 수는 없을 것이다. 민주적이고 평등한 사회를 위한 제도적인 장치들을 마련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가야 할 것이다.
ㅣ담백한
“’강한 사람‘은 자신에게 정직하며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의 책임을 다함으로써 자신이 살고 싶은 대로 살아갈 수 있는 자신과 공동체를 만들어 갈 수 있는 사람이라고 나는 경험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나도 강한 사람을 지향한다. 그렇게 강한 사람이 되어 갈 것이다”
나의 글 <강한 사람>의 마지막 문장들이다. 글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 마지막 문단에도 ’경험했다‘는 표현이 등장하듯이 ’경험체‘(?)로 쓰인 글이다. 내가 글에 쓰인 것과 같은 ’강한 사람‘을 경험했다는 것이지 내가 강한 사람이라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지막 두 문장처럼 글 속의 ’강한 사람‘, ’자기 통제‘와 ’자기 정직‘이라는 기준에 부합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은 사실이다. 해서 그런 ’강한 사람‘을 지향하는 것은 맞지만 그런 사람이 되어 갈 것이라고 썼지만 정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뭔가를 강하게 지향하거나 되려고 하는 사람은 아니다.
지속적으로 서서히 타원을 그리듯 지향한 바를 향해 나아가는 편이다. 누가 보면 저래가지고 목표한 바를 이루겠나 싶을 정도로 뭔가를 치열하게 끈질기게 하는 편이 못되는 사람이다. 자기통제도 잘 안되는 편이다. 좀 충동적인 면도 있고 의도해서 뭔가를 하다가도 방향을 바꾸기도 한다.
그러니까, 나란 사람은 ’강한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래서 글과 같은 강한 사람을 지향하는 것도 맞고 그렇게 되어 가려는 것도 맞다. 아마도 수십 년째 지향하는 바가 아닌가 싶다. 자기 통제에서는 아직 강한 편이 못 된 것 같지만 상대적으로 나 자신에게 정직하겠다는 ’자기 정직‘에서는 좀 강한 편이 되지 않았나 싶다.
이 글을 쓰는 이유 중 하나도 사람들이 그 글을 읽고 내가 글에서처럼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싶어서, 그렇지 않다고 나에게 정직하고 싶어서 쓰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또 다른 이유는 글을 쓰면서 문득 그럼 나는 어떤 ’사람‘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는 의문이 생겨서다.
이제까지 살면서 들은 말들을 떠올려보면 ’강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좋은 사람‘이나 ’따듯한 사람‘은 종종 들은 바가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의 무리 속에 있으면 모든 사람을 챙겨야 하는 혹시 누가 소외되지 않을까 신경 쓰는 오지라퍼나 정의의 기사 같은 면모가 꽤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아니다. 지금은 사람들의 무리에 가급적 끼지 않으려 하고 사람들에게 유익하지는 않더라도 해는 끼치지 않으려고 한다. 나의 가치관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이미 여러 글에서 밝혔듯이, 나는 ’소박한, 최소한, 무해한‘ 삶을 지향하며 살아가려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강한 사람‘을 지향하면서도, 그래도 ’좋은 사람‘, ’따듯한 사람‘의 면모를 어딘가 지니고 있으면서도 또 시간이 지나 언젠가 나를 돌아봤을 때 ’욕심이 없고 순박하다‘, ’연하고 밝다’와 같은 의미의 ‘담백淡白’한 사람으로 회상하게 되기를 바라본다.
2026. 3.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