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해방을 쓴다. ‘미감美感의 해방’이라는 표현을 애정한다. ‘감각’과 ‘의식’이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한 몸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나는 ‘미감의 해방’을 ‘미에 대한 의식’, ‘미의식’의 해방이라고 의식하기도 한다. 아름다움은 오감五感에 의해 감각적으로 표출되지만 그 감각의 내면에는 사유가 자리하고 있다고 의식하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아름답기를 감각하고 의식하는 것은, 감각을 사유하고 사유를 감각하는 것은, 사유하는 동물, 인간의 진화를 증거하는 것이기도 하다. 언어와 노동의 발명과 진화, 과학기술의 발전과 생산력 증대가 가져다준 인류의 진화에는 사상思想이나 문학과 예술의 진화도 있다. 그 인류 진화의 가운데에는 아름다움에 대한 의식도 있는 것이다. 감각에 즐거움을 주는 쾌감의 미도 있고 가짜가 아닌 진짜, 아름다운 이야기(美談), 아름다운 저항과 같은 성찰과 행위의 고통이 따를 때만 가능한 아름다움을 만나기도 하는 것이다. ‘미감과 미의식’의 ‘해방’을 이야기하는 것은 미에 대한 다양한 감각과 의식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에 매수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잘 팔리는 상품이 되는 것이 그리하여 자본을 축적할 수 있는 것만이 ‘아름답다’는 자본 권력의 논리로부터의 해방을 이야기하는 것은, 민주적이고 평등한 미감과 미의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겠다.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해방을 쓰기 위해 나는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ㅣ여전히 아름다운지
변한 건 없니 날 웃게 했던/ 예전 그 말투도 여전히 그대로니/ 변한 건 없니 내가 그토록/ 사랑한 미소도 여전히 아름답니/ 그는 어떠니 우리 함께한 날들/ 잊을 만큼 너에게 잘해주니/행복해야 돼 나의 모자람/ 채워줄 좋은 사람 만났으니까.(김연우, ‘여전히 아름다운지’)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다 ‘내가 사랑한 미소’를 떠올리다 ‘여전히 아름다운지’ 생각에 잠긴다. 생각을 따라 생각이 흐른다. 미소 자체가 아름다운지, 내가 사랑해서 아름다운지, 내가 사랑한 미소만 아름다운지, ‘아름다움’으로 생각이 흘러간다.
‘아름다움’美은 선함善이나 옳음眞과 무관하지 않다고 여기고 있다. 선하면 아름다워 보이고 옳으면 아름다워 보인다. 그것은 선함이나 악함, 옮음이나 그름에 대한 ‘의식’에 따른 것이다. 그 ‘의식’에 따라 선악이나 진위는 달라진다. 어떤 의식에게는 선함이 악함이고 옳음이 그름이기도 하다. 그 반대이기도 하다. 선함과 악함, 옳음과 그름, 둘은 한 몸이다.
악함일지도 모르는 그름일지도 모르는 선함과 옳음이 아름다운 것은 생명을 긍정해 주고 살려주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생명을 긍정해 주고 살려주는 선함은, 옳음은 아름답다고 여긴다. 아름다움이 본디 그런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내가 ‘의식’하는 아름다움은 그렇다는 말이다. 그것이 나의 아름다움美에 대한 의식, ‘미의식’美意識이다.
위험으로부터 생명을 살리는 이야기가 ‘미담’美談인 것도, 거짓으로부터 고통받거나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려는 ‘저항’이 아름다운 것도 생명을 살려주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나는 그렇게 아름다움을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아름다움을 의식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나의 ‘선함’이나 ‘저항’에 대한 ‘의식’이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미소, 주름진 얼굴을 가진 노인의 미소, 나와 생김새나 피부색이나 입장이나 처지는 다르지만 그들의 미소는 그 자체로 쾌감을 준다. 그런데 쾌감을 넘어 미소가 ‘아름답다’고 ‘의식’하는 데에는 그럴만한 사연事緣이 있다고 여긴다.
사연은 보거나 듣거나 경험하거나 상상하거나 한 것들에 자신의 생각을 보태 구성한 주관적인 이야기이다. 그들 주관적인 사연에 따라 아름답다고 의식하는 미의식도 주관적이다. 아름다움은 미의식은 제각각인 것이다. 제각각이지만 여러 사람이 공감하고 동의하는 아름다움도 미의식도 있을 것이다.
그들 사연에 따라 생명을 긍정해 주고 살려주는 것들이 아름답다는 미의식에 나는 공감하고 동의한다.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다 내가 사랑한 그 미소, 그 선함, 그 옳음, 그 저항들을 떠올린다. 여전히 아름다울 것이라고 여기며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보며 웃으며 걸어간다.
ㅣ완벽한 거짓말
영화 <완벽한 거짓말>의 주인공 마티유의 거짓말이 완벽했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마티유의 거짓말을 의심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러할 것이다. 마티유의 거짓말은 완벽하지 못했고 거짓말의 대가는 너무나 컸다.
마티유는 애초에 거짓말을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걸 몰라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없다는 반응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마티유는 ‘죽은 사람의 기억’을 훔친다. 작가가 되고 싶었고 출판사에 보내는 원고는 번번이 출판 불가 통보를 받는다. 마티유는 죽은 사람의 기억을 훔쳐서라도 작가가 되고 싶었을 것이다. 거짓말이 몰고 올 흔한 비극적 결말을 몰랐을 리 없을 테고 간절한 욕망은 그렇게 망각을, 아니 거짓말을 몰고 온다.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는다. 거짓말이 들통나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고 처벌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거짓말은 거짓말을 하는 순간 지켜내야 할 참말이 되어 간다. 마티유는 거짓말이었는데 참말이 된 거짓말을 지켜내기 위해 살인을 하고 자신마저 죽은 사람으로 만든다. 사랑했던 아내와 아이에게서마저 떠나야 했다.
완벽해야 하기에 영화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어야 했던 그의 슬픈 거짓말을 보면서 과연 그 의 아내에게 보였던 마음마저도 진심이었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이 역시 그의 거짓말이 치러야 할 대가일 것이다. 그의 모든 말과 행동이 진심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다. 거짓말로 인해 더 이상 사랑하는 이에게마저 진실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 또한 거짓말로 인해 치러야 할 슬픈 대가인 셈이다. 영화가 보여주듯 비극적 결말이 거짓말의 운명인 것이다.
ㅣ너에게
나의 어릴 적 내 꿈만큼이나
아름다운 가을 하늘이랑
네가 그것들과 손잡고
고요한 달빛으로 내게 오면
내 여린 마음으로 피워낸
나의 사랑을
너에게 꺾어줄게
(김광석, ’너에게‘ 중에서)
가을 하늘이 드높고 푸르게 펼쳐지기 시작하는 이맘때면 김광석 형의 ’너에게‘를 들어주어야 한다. ‘아름다운 가을 하늘이랑‘이라는 가사 때문이기도 하고 그에 어울리는 김광석 형의 목소리가 그려주는 그림이 너무 아름다워서이기도하다. 내가 그림 속 주인공이 된 것 마냥 행복해지는 노래다.
가을 하늘을 노래하고 있을 만한 아름다운 시절도 못되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가을이어서, 아름다운 시절이었음해서 ‘너에게’를 듣는다.
1995년 가수 김광석이 세상을 떠난 이후 ‘너에게’는 가을이 오면 ‘아름다운 가을 하늘이랑’ 늘 함께하는 노래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노래에 대한, 가을 하늘에 대한 느낌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기도하다.
매년 다르게 느껴지는 많은 요인들이 있을 것이다. 나이 변화나 기후 변화에 따른 것도 있을 것이고 가을이라는 계절에 겪은 크고 작은 기쁘고 슬픈 일들로 인한 변화도 있을 것이다.
2017년 가을부터는 하늘을 올려다 볼 때면 그 해 여름 쿠바에서 만난 사진 작가를 준비중이라던 에이스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폰으로 하늘을 찍고 있던 나에게 ‘하늘을 왜 찍어?’ 장난스럽게 던진 말 때문이다.
에이스가 그냥 지나가면서 던진 말이기는 하지만 돌이켜보면 이제 막 사진 작가를 준비 중이던 에이스다 보니 사진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던것 같다. 자신은 주로 사람이나 사람의 얼굴을 찍는다고 했다. ‘사람을 왜 찍어?’ 다시 만난다면 물어보고 싶다.
에이스의 그 물음이 내 몸에 남은 것은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 때문일 것이다. 자연 풍경이나 아이의 해맑은 미소처럼 가치판단이 따르지 않지만 쾌감을 주는 거의 본능적으로 아름답다고 느끼는 ‘원초미’와 '미담美談'이나 '아름다운 저항'과 같이 복합적인 판단 기준에 따른 ‘복합미’를 구분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에이스가 사람을 주로 찍는 것이 그런 ‘복합미’를 미적으로 더 낫다고 판단하기 때문인지,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해 진 것이다. 자신이 한 달간 생활했다는 파퓨아 뉴기니 섬의 원주민들과의 생활이 그런 미적 판단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인지도 궁금하다.
에이스가 아침저녁으로 일출일몰을 찍으러 다니고 지구 자연이 파괴되는 것을 염려하기도 하고 아이들과 잘 어울리는 것을 보면 ‘원초미’와 ‘복합미’ 모두를 취하고 있지 않은가 싶다. 나 역시 ‘원초미’와 ‘복합미’를 구분할 수는 있겠지만 어느 하나를 배제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니까 ‘복합미’에 따른 아름다운 인간들이 ‘원초미’에 따른 자연이나 아이의 미소나 원주민들의 삶을 지켜내며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그들을 파괴하려는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며 살아간다면 ‘원초미’와 ‘복합미’ 모두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2026. 3.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