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해방을 쓴다. ‘남에게 구속을 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뜻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자유自由’고, ‘속박하거나 가두어 두었던 것을 풀어서 자유롭게 함’이 ‘해방解放’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따른다면 나는 ‘자유롭기 위해서 해방을 쓰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자기 뜻에 따라 행동하는 트럼프 대통령 같은 권력자들은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고, 나는 내 뜻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 위해서 해방을 쓰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트럼프 같은 권력자들이 자기 뜻에 따라 전쟁도 일으키고 남의 나라 대통령도 납치하고 파병도 요구할 수 있는 자유로운 사람이라면 나는 그와 같은 제국 권력, 자본 권력, 국가 권력, 정치 권력, 사법 권력, 언론 미디어 권력, 지식 권력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 즉, ‘해방’을 위해서 이렇게 글을 쓰는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해방을 쓰기 위해 나는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ㅣ자유는 특권이 아니라 책임으로 이루어진다
스벤 브링크만 Svend Brinkmann은 ‘어느 순간에도 희생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는가?’라고 묻는다. 그의 대답은 ‘자유’다. 사람은 과연 자유의지를 갖고 자기 의지대로 행동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저 호르몬 같은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 존재에 불과할까? 브링크만은 자유의지라는 개념이 우리가 만든 환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관점은 결국 구체적인 삶의 차원에서는 별 의미가 없다고 본다.
“사회를 구성하는 도덕이나 법, 민주주의 같은 규칙이나 제도는 사람들이 자유의지를 지닌 책임 있는 행위자로서 살아간다는 가정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그래야 자기 행동을 책임질 수 있으니까요. 우리가 자유롭게 행동하지 못한다면 설령 누군가 범죄를 저지른다고 해도 그 사람을 처벌하는 일은 부당할 것입니다.”
브링크만의 주장에 따라 모든 인간 행위는 자기 의지에 따른 자유로운 행위라고 이해한다. 인간의 모든 행동이 자유의지에 따른 것이기에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라는 말도 성립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자유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방종이나 범죄에 대한 규정과 처벌도 가능할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도덕이나 법과 같은 규칙이나 제도가 필요하다는 것일 테다. 그래서일까. 브링크만은 자유와 관련하여 ‘오직 개인적인 선택과 행동을 통해 스스로의 운명을 자유롭게 창조할 수 있다’는 사르트르와 같은 실존주의의 관점보다 ‘자유는 특권이 아니라 책임으로 이루어진다’는 카뮈의 관점을 취한다.
브링크만은 ‘자유는 욕망대로 사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추구할 가치가 없는 욕망이라면 스스로 억압할 수도 있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추구할 가치가 없는 욕망은 어떤 욕망이며 누가 결정하는가. 욕망을 스스로 억압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인데 어떻게 억압할 수 있으며 왜 억압해야 하는가.
브링크만에 따르면 자유롭기 위해서는 자신의 욕망에 대해 성찰하는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추구할 가치가 없는 욕망을 억압하고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는 성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신의 의무를 다함으로써 법과 제도와 같은 규칙에 구속되지 않을 것이며 그럼으로써 개인들은 자유로워지고 공동체도 유지된다는 것이다.
브링크만의 ‘자유론’에서 책임과 의무, 자기 통제가 강조되는 것은 우리가 ‘공동체의 일부’라는 전제 때문일 것이다. 원하는 것을 방해받지 않고 할 수 있는 자유도 그와 같은 자유가 보장되는 공동체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 공동체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이 어떠해야 하는가는 것은 중요하다. 공동체에 대해 책임을 다하지 않음으로써 구성원들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공동체를 지켜내지 못한다면 브링크만이 주장하는 자유는 불가능할 것이다.
브링크만의 자유를 위해서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 공동체를 보호할 줄 아는 자기 통제력을 가질 수 있는 윤리적인 형태의 양육과 교육’이 필요하겠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 지구의 많은 사회에서 마땅히 해야 할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하는 자유를 누리고 있는 자(者)들은 ‘특권’을 가진 자들이다.
‘특권’ 자체가 없어져야 하겠지만 그러기 위해서도 공동체의 대다수 구성원들의 ‘자기 통제’가 책임을 다하지 않는 특권층의 무책임을 문제 삼는 일을 스스로 통제하는 결과를 가져와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스스로 특권을 내려놓는 ‘자기 통제’는 대단히 어렵기 때문에 특권을 누리려 할 뿐 책임을 다하지 않는 자들에게 책임을 물을 철저한 장치들을 마련하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개인이 스스로 자신을 존재하게 한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다함으로써 자신의 자유도 누릴 수 있는 공동체를 이루려는 브링크만의 관점은 오늘날의 전 지구적인 ‘경제·환경·전쟁’ 위기를 야기하며 공동체를 파괴하는 자본독재국가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브링크만은 우리에게는 자유를 어떻게 정의하든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원칙이 하나 있다고 주장한다. “자유를 도구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유는 그냥 좋은 것입니다. 그게 개인의 행복을 증진하거나 국가 경제에 득이 되지 않더라도 말이지요.”(브링크만, 219)
브링크만이 말하는 자유의 도구화가 ‘생산성의 증대’와 ‘물질적인 풍요’를 위해 노동하는 노동자의 자유가 희생되는 것을 의미한다면, 자본가의 이윤을 위해 인간만 아니라 동식물이 살아가는 생태계의 자유를 희생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생산성 증대와 물질적 풍요를 위해 전쟁을 일삼으며 평화롭게 살아갈 자유를 희생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러한 희생으로부터 자유를 지켜내는 것 자체가 그와 같은 자유의 희생을 방지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싸울만한 가치가 있는 자유란 어떤 종류의 자유일까요? 다른 것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지 않는 자유란 어떤 종류의 자유일까요?”(브링크만, 205)라는 브링크만의 물음에 다음과 같이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들의 이윤추구를 위해서 노동자들을 착취하며, 생태계를 파괴하여 ‘경제·환경·전쟁’ 위기를 야기하는 자본독재국가권력에 저항할 자유, 그들의 수단으로 전락하지 않을 자유이다.
그와 같은 자유를 추구하는 것은 브링크만을 따라 자기를 통제하여 자기 자신의 주인으로 공동체를 보호하는 책임을 다함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바를 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한 자유를 가능하게 해 줄 가장 강력한 방법과 무기는 그러한 자유로운 공동체를 함께 만들어 갈 나, 너, 우리일 것이다.
ㅣ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
“수용소는 우리를 동물로 격하시키는 거대한 장치이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동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곳에서도 살아남는 것은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똑똑히 목격하기 위해 살아남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는 최소한 문명의 골격, 골조, 틀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가 노예일지라도, 아무런 권리도 없을지라도, 갖은 수모를 겪고 죽을 것이 확실할지라도, 우리에게 한 가지 능력만은 남아 있다. 마지막 남은 것이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 지켜내야 한다. 그 능력이란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당연히 비누가 없어도 얼굴을 씻고 윗도리로 몸을 말려야 한다. 우리가 신발을 검게 칠해야 하는 것은 규정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존중과 청결함 때문이다. 우리는 나막신을 질질 끌지 말고 몸을 똑바로 세우고 걸어야 한다. 그것은 프로이센의 규율을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쓰러지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다.”(F.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거나, 차이를 차별로, 다름을 틀림으로 인정해 버리는 ‘동일성 사유’의 폭력을 비판하며 ‘동일성 속의 차이를, 차이 속의 동일성을 봐야 한다’고 자신에게 요구(T. W. 아도르노)하는 비판적 성찰은 중요하다. 또한, ‘악의 평범성’(H. 아렌트)과 사회의 ‘권위주의적인 성격’(W. 라이히)에서 알 수 있듯이 가족으로부터 학교, 교회, 군대, 기업에서 국가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비인간으로 격하시키는 일상적인 장치들에 의해, 또한, 이윤의 무한증식을 위해 자연을 파괴하고 이윤이 되지 않는 인간은 무용한 것으로 파괴하는 자본권력에 의해 자행되는 ‘동일성의 폭력’에 동조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외경스러운 자연이라서가 아니라 동식물과 더불어 살아가야 할 삶의 터전이라서, 존엄한 인간이라서가 아니라 ‘쓰러지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 살아남아서 ‘나중에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똑똑히 목격하기 위해서’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찰’을 통해 더 나은 방향으로 사회를 변화, 변혁시켜 나갈 줄 아는 인간 이성에 대한 진보를 믿는 한, 그래도 동물보다는 인간이 좀 나아졌다는 진보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한, 그래서 여전히 인간 이성은 진보하고 있고 아우슈비츠가 인간 이성이 진보한 그 정도 수준이었다고 겸허히 받아들일 줄 안다면, ‘지양의 변증’을 통해 부정하며 긍정해 나가겠다면 아우슈비츠가 추구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물어야 한다. 동물적 야만에 합목적적인 이유가 있겠냐만 그것은 진보한 인간 이성이라면 누구도 바라지 않을 ‘야만적 학살 전쟁’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는 것과 같다. 그 물음에 아직 덜 진보한 평범한 악한들의 행위라고 인정하는 한편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온전히 이성의 목적이 아니라 자본에 길들여진 인간 이성의 목적, ‘자본권력’이 행한 ‘관습’의 결과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것은 국가권력의 이름으로 노동하는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그들의 자유를 약탈하여 사회를 자유롭게 지배하는 자본독재국가권력의 전형적인 관행이다. 아우슈비츠와 같은 자본독재국가의 거짓을 말하지 않는 한, 다만 그들에게 동조하는 한 아우슈비츠의 강제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울 길은 없어 보인다. 노동력을 착취당할 자유만이 존재하는 그 곳은 다름 아닌 ‘자본의 끝’을 보여준 아우슈비츠였다.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것에서조차 배제당한 기생충들이 오징어 게임을 하며 자유롭게 살아가는 이곳은 지구 곳곳에 존재하는 지옥과도 같은 아우슈비츠, 아닌 자본독재국가이다.
ㅣ해방주체가 만드는
‘해방일지’를 쓰며 해방을 갈구하는 염미정(이하 미정)에게, ‘저녁이 없다는, 모든 관계가 노동이라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는다는’ 미정에게 노동해방의 의미는 ‘한 번도 채워진 적이 없는 자신을 가득 채우는 것’, ‘여기서 저기로 뚫고 나가는 것’, ‘추앙받는 것’, 즉, ‘넌 뭐든 할 수 있다. 뭐든 된다. 응원 받는 것’이다.(드라마,『나의 해방일지』참고)
미정이 쓰는 ‘나의 해방일지’가 콕 집어서 ‘노동해방’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결핍된 삶’으로부터의 해방으로 보인다. ‘저녁이 없는 삶’, 서울을 중심으로 주변화된 ‘경기도민’의 삶,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삶’,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는 삶’과 같은 ‘결핍된 삶’은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다수 노동자들의 삶의 양태로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현실 순응적이지만은 않은 ‘자신을 가득 채우려는’, ‘여기서 저기로 뚫고 나가려는’, ‘추앙을 받으려는’ 주체적인 모습 또한 노동자들의 삶의 한 양태로 보인다.
미정의 ‘해방일지’에서 ‘노동해방’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지 ‘해방’의 의미에 의문을 갖는 것도 노동자들의 시선들 중 하나일 것이다. ‘노동해방’을 다루는 영상물들인 켄 로치 감독의 영화들을 떠올리면 더욱 그러하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적극적으로 자신이 처한 노동 현실을 변화시키려 ‘투쟁’하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노동활동가와 함께’(『빵과 장미』), 친구와 ‘자영업자가 되어’(『자유로운 세계』), 혼자서 ‘관료주의적인 국가기구에 맞서’(『나, 다니엘 블레이크』) 싸우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미정의 ‘나의 해방’을 위한 노력은 노동의 현실을 변화 시키기 보다는 자기 고양을 통해 현실을 이겨내려는 정신승리적인 싸움에 가까워 보인다. 그래서, 미정이 처한 노동현실을 변화시키는 만큼, 변화시키기 위해 싸우는 만큼 미정이 바라는 삶의 해방도 가능할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미정의 해방일지에서 해방주체로서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날 추앙해요’라는 요청이 그것이다. ““매일 술 마셔요?” “아니면 뭐 해?” “할 일 줘요? 술 말고 할 일 줘요? 날 추앙해요. 난 한 번도 채워진 적이 없어.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가득 채워지게. 당신은 어떤 일이든 해야 돼요. 난 한 번은 채워지고 싶어.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사랑으론 안 돼. 추앙해요.”(『나의 해방일지』, ‘염미정과 구씨의 대화’). 미정이 ‘날 추앙해요’라고 요청하는 모습은 주체적으로 보인다. 그것도 할 일이 없다는 구씨에게 할 일을 주겠다는 그 ‘일’이 자신을 추앙하라는 것이다. 과연 노동자들 중에 자신을 추앙하라고 요청할 수 있는 자가 얼마나 될까. 그것도 ‘사랑’을 받겠다는 것이 아니라 ‘추앙’을 받겠다니, 미정의 ‘추앙의 철학’이 무엇인지 궁금해지지만, 추앙을 ‘요청’한다는 것은 추앙받을만한 존재로 살겠다는, 타인의 추앙의 요청에 응하여 추앙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읽힌다는 점에서 해방주체로 보인다.
‘추앙’의 사전적 의미는 “높이 받들어 우러러 봄”을 의미한다. 인간이 인간을 그처럼 추앙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우러러 볼만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미정에게 추앙할만한, 우러러 볼만한 무엇이 있는지 의문이 들다가도 추앙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구씨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구씨가 ‘멋있다’고 했던 말의 의미는 추앙하고 싶다는 것일 테다. 구씨가 묻는다. “추앙은 어떻게 하는 건데?” 미정이 답한다. “응원하는 거 넌 뭐든 할 수 있다 뭐든 된다. 응원하는 거.” 미정이 자신의 해방을 위해 구씨의 추앙을 이끌어 냈다는 점에서 해방주체적이다.
“뚫어야 될 문제를 뚫어. 엉뚱한 데로 튀지 말고”라는 구씨의 조언과 “뚫고 나갈 거야. 여기서 저기로”라는 미정의 의지도 주체적으로 보인다. 누군가에게는 대단할 것 없어 보이는 조언과 의지일 수 있겠지만, ‘여기와 저기’가 가리키는 바가 구체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자신이 처한 노동 현실로 인해 ‘결핍된 사회로부터 채워질 수 있는 사회로’라고 받아들여도 무방해 보인다. 또한, ‘뚫고 나갈거야’라는 말은 현실을 회피하지 않겠다는 말로 들린다. 그런 점에서 미정을 추앙하게 된다. ‘넌 뭐든 할 수 있다 뭐든 된다’ 응원하고 싶어진다. 나의 해방일지만 아니라 ‘우리의 해방일지’를 함께 써 보지 않겠냐고 권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렇게 미정은 구씨와 함께 서로를 추앙하며 해방일지를 쓰며 해방주체가 되어가는 것일 테다. 해방주체가 해방주체를 만들어 가는 것일 테다. 그 과정에서 ‘자본주의 생산방식’과 ‘자본국가’라는 삶의 ‘본질적인 문제’에까지 가 닿게 될 것이다.
2026. 3.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