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르노 <변증법 입문> 읽기
칸트는 인식의 보편성을 제멋대로 자의적으로 망상으로 만들어낼 수 없다고 보고 누가 봐도 맞는 것으로 가기 위한 그런 인식의 보편성, 필연성을 위한 기본 틀을 찾은 것이다. 선험 논리학이 누구에게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이성, 오성, 감성이라는 능력은 천부적으로 있다고 전제한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그 능력을 잘 못 쓸 때가 있다. 왜 못 쓰나. 공포 때문이다. 권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걸 제멋대로 억압하기 때문에 그걸 극복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그걸 못 쓰는 사람들을 성숙하지 못한 상태라고 본다.
칸트는 미성숙 상태에서 성숙 상태로 가는 게 계몽이라고 생각했고 이성을 쓰는 사람 이성 감성 오성이라는 자신의 천부적 능력을 써먹을 줄 아는 사람들이 성숙한 상태로 가는 건데 그 성숙한 상태로 가지 못하는 이유가 그런 외적인 조건들 때문이다.
칸트가 제시하는 처방은 용기를 가져라, ‘이성을 사용할 줄 아는 용기를 가져라’는 것이다
칸트는 나름 혁명적이기도 하고 위대한 면이 있다. 누구나가 다 그렇게 생각할 줄 알고 누구나 다 미감을 가지고 있고 왕이나 제후들만 미감을 가진 게 아니고 무지렁이들도 다 동일한 미감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 그런 점에서는 평등주의자고 보편성을 강조하는 그런 측면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 속에서는 여러 가지 한계에 부딪히는 것이다.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가 할 때는 그 모순이라는 것이 감성을 초월한 단계에서만 생겨나느냐 아니면 감성과 오성이 갈라지느냐 등등은 헤겔이 제기하는 문제다.
그런 게 아니다. 오성 없는 감성 없다. 감성 없는 오성도 없다. 같이 섞여 있다. 같이 작동한다. 물론 다른 역할을 할 수 있지만 그것들을 따로 놓을 수는 없다. 그래서 감성을 초월한 영역이라는 걸 따로 한정할 필요 없이 이미 처음부터 모순은 우리 인식이 진행되는 한 끊임없이 작동하고 있다. 그래서 모순을 인식의 기반으로 삼아야 한다. 헤겔은 그런 입장으로 갔던 것이다.
영역을 칼같이 나눌 수 있느냐 하는 부분에서 헤겔이 문제 제기한 것이다. 그렇게 모순을 어느 일정한 영역에서만 인정한 것들, 그것도 부정하고 초감성적 영역에서 이율배반에 빠진다고 봤던 것, 그건 성립이 안 된다는 것이다.
나아가 모순이라는 게 그냥 내 사고의 영역에만 제한되는 게 아니라 실은 현실의 모순이 문제라는 것이다. 칸트는 자료들이 감성을 통해 들어온다. 감성을 통해 수동적으로 받아들여 전에 자료는 카오스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우리가 거기에다 오성의 법칙들을 적용해서 드디어 질서가 생긴다고 생각한다.
내가 거기에 법칙을 투여한 것만 나는 안다. 이런 논리다. 그것도 좀 말이 안 된다. 헤겔은 이미 대상들이 다 그런 감성, 오성 등등과 더불어서 개념적으로 정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미 질서를 가진다. 대상 자체도 이미 우리가 개인적으로 알기 전에 축적되어 온 노동의 결과로 이미 현실 자체가 일정한 질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법칙적인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 자연에도 그런 것들이 알게 모르게 삼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관념론적인 측면도 있다. 어쨌든 그런 대상 자체가 카오스는 아니다. 일정한 법칙성을 가지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사후적으로 또 알아가기도 한다.
그래서 인간 이성이 자연에 투여했던 모든 것들을 다시 알아가는 그런 측면이 또 있다. 그것은 절대적 관념론 아니냐. 비난을 받기도 하는데 유물론적 입장에서 봐도 어딘가 대상이 아무 질서도 없는, 법칙도 없는 그런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현실 자체도 그렇다. 뉴튼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기 전에는 그 법칙이 작동 안 했느냐 이런 문제다.
우리가 인식하든 안 하든 상관없이 자연의 법칙이 이미 작동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유물론이다. 헤겔은 그쪽에 더 가까운 것이다. 맑스 엥겔스 관점에서 보면 헤겔은 뒤집힌 유물론이다. 관념론적인 설명을 하고 관념론적인 틀로 보지만 실제로 들여다보면 헤겔의 논리 전개는 유물론과 다를 바 없이 진행된다. 그런 점에서도 칸트와 달라진다.
영역 구분을 칼같이 하는 그런 사고방식은 오늘날에도 분업화되고 사물화 되고 하는 그런 틀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고 그것을 어떻게 하면 상호작용과 상호 전도 이행 이런 것들을 같이 보려고 하느냐 하는 건 변증법의 문제의식이다.
헤겔주의하고 칸트주의는 거기서 확 달라진다. 두 번째는 그렇게 모순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인간 사고에 아주 깊이 내장되어 있어서 그것들 없이는 사고가 진행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사고의 측면과 동시에 현실에서의 모순을 결합시키려고 했던 것, 이게 헤겔의 또 중요한 업적이라는 것이다.
그냥 겉으로 보면 헤겔 것은 뭔가 좀 입체적으로 보이고, 칸트는 거기에 비해서는 그냥 서술적으로 보인다. 이게 있으면 이게 들어와서 이게 어떻게 되고 통합이 되어서 어떻게 된다. 그런 거고 헤겔은 뭔가 쌓아나가는 그런 느낌이다.
그런 관점으로 보면 칸트는 선험적인 틀, 시간 공간이라는 감성 형식, 내적 외적 감성 형식과 순수 오성 개념이라는 범주 12개, 이 두 가지 틀을 발견한 것이다. 자기 나름대로 여태까지는 인식을 어떻게 하느냐 할 때 중구난방으로 형이상학으로 날아가고 그랬는데 보편타당 필연적인 인식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그 틀이 뭔지를 먼저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칸트는 주체를 들여다본 거고 주체를 들여다보면서 시간 그다음에 공간 그다음에 이 순서대로 개념이라는 기본 요소를 자기가 찾았다고 생각하고 그것들을 통해서 우리 인식의 보편성이 확보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경험적으로 뭘 알려고 그러면 경험에 따라서는 끊임없이 오류가 생기기도 하고 중구난방으로 될 수 있다는 그 과정이 서술적이라는 것이다. 그런 방법을 만들어내면 그다음에 나머지 거는 거기다 꿰맞추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칸트주의다.
헤겔은 자기 말로는 자신의 방법은 건축물 전체다. 『정신현상학』이라는 방대한 책 전체가 나의 방법이다. 그것이 헤겔의 논리다. 칸트는 12 범주랑 시간 공간 범주 이게 논리고 헤겔에게는 크게 보면 변증법 혹은 『정신현상학』 에서 나오는 것이 논리다.
동물학은 모든 동물에 관한 학이라고 정해봐야 아무 의미 없다. 구체적으로 다 동물들을 연구해서 그것들의 발전이라든지 상호작용이라든지 관계라든지 이런 것들을 다 정리한 체계가 되어야만 동물학이 되는 것이다. 헤겔은 이런 관점이다.
칸트의 경우에 동물학을 모든 동물에 관한 학으로 정의하고 정리해 버리면 거기에 맞춰서 이제 연구하면 될 것 같은 그런 느낌을 준다. 헤겔의 체계는 전개된 모든 과정 전체다. 헤겔 체계는 두 번 다시 반복이 잘 안 된다.
2024. 1. 29.
*위 글은 아도르노의 <변증법 입문> 번역자(홍승용)의 강의 노트를 바탕으로 작성한 것입니다. 테오도어 W. 아도르노, <변증법 입문>, 홍승용 역, 세창출판사,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