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 엥겔스, 루카치, 그리고 아도르노에게 '리얼리즘'은 ‘사태 자체에 충실함‘을 의미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고, 또한 나는 그러한 입장이다.
'리얼리즘'이 ’진리‘의 문제, 즉, ’무엇이 옳은가‘, ’누구 말이 맞느냐‘는 문제와 연관이 있다는 점에서 그들과 나에게만 국한된 문제는 아닐 것이다. '리얼real'에 대한 입장이 천차만별이라고 한다면 누구의 말이 맞는지는 누가 결정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결국, 그 기준은 ’사태 자체‘에 있다는 것, ’사태 자체에 얼마나 충실했느냐'에 있다는 것이 맑스, 엥겔스, 루카치, 아도르노의 입장이며, 나 역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진리의 문제에서도 자신의 진리가 유일한 진리임을 ’사태 자체‘에 근거해 드러낸 것을 검증받음으로써, 절대적일 수는 없지만 상대적인 타당성을 인정받음으로써, 상대적으로는 절대적인 진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진리라고 해봤자 검증으로 입증하지 못한다면 그 진리는 오래가지 못할 것이고, 하나의 유일한 진리는 없다고 해봤자 늘 상대적으로 조금 더 진리인 것이 유일한 진리인 양 받아들여지기도 하는 것이다.
해서, 진리는 알 수 없다거나(불가지론), 모두가 진리라거나(상대주의), ’있는 그대로‘가 진리라거나(실증주의), 절대적이고 고정불변의 영원한 진리(관념초월주의)를 주장할 수는 있겠으나 그런 주장이 진리인지는 검증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진리에 관한 한 '사태 자체에 충실함'으로써 무엇이 진리인지를 부단히 드러내려는 것이야말로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입장이 아도르노의 리얼리즘에 대한 입장이라고 나는 이해하고 있고 그에 동의하는 입장이다.
’진리‘라는 단어 대신 ’본질‘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태 자체에 충실함으로써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 리얼리즘이라고 해도 드러난 그것이 본질인지는 검증 받아야 하는 것이다. ’무엇이 본질인지‘, ’뭣이 중헌지‘ 검증되어야 하는 것이다.
정치경제적인 요인으로 발생하는 불평등한 지배관계가 드러날 때, 그러한 관계가 평등한 관계로 변화 할 가능성이 드러날 때 리얼하며 진짜라고, 그것이야말로 본질적으로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역시 검증받아야 할 것이다.
사태 자체에 충실하여 드러난 이론이나 예술작품이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을 드러내고 있는지 그렇지 못한지 검증 받겠다는 자세야 말로 본질적으로 중요한 문제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무엇이 옳은지, 누구 말이 맞는지, 진리가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겠다.
2024. 11. 27.
대문사진 - 칠레 산티아고 국립 미술관에서. 영진 찍음. 작가 및 제목 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