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적으로 보편타당한’ 사회적 의미를 가지는 ‘언어’가 있는지도 의문입니다.
오히려, 모든 ‘언어’는 특정한 사람들이나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을 가집니다. ‘글과 말과 몸짓’이라는 언어가 항상 이데올로기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항상 이데올로기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언어’도 ‘중립적이거나, 보편타당하거나, 절대적이거나’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언어든 ‘중립, 보편타당, 절대’의 이름으로 마치 그런 것처럼 특정한 사람들이나 집단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회적 통념’과 같은 관념이 형성되기도 합니다.
그런 이유에서 어떤 ‘언어’의 ‘객관적’ 의미를 찾아 형성해 나가는 과정은 중요합니다. 그 과정은 언어의 객관적 의미를 묻는 일일 것이며, 그 과정에 따라 그 의미는 가변적일 수 있습니다.
만일, ‘참하다’는 말이 ‘생김새, 성품, 결혼 상대자’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면, ‘참한 사람’이 되는 것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가지는 것이라면, ‘참하다’는 것의 기준은 누구의 것인지, 그 의미는 무엇인지 사회적으로 충분히 논의되어야 하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저의 기준에서는 생김새나 성품으로 인해 참해 보이는 경우도 있지만 그보다는 ‘평등한 세상’을 이루어가는 사람들이 참으로 참해 보입니다.
-하영진, ‘참하다’, <천천히 한 걸음> 36-3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