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의 <일본산고>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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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을 넘어 ‘영토의 경계’를 넘어 인류가 하나 되기를 하나의 인류가 되기를 바라는 오늘날 민족을 말하는 것 자체가 민족주의라고 비판받기 십상이다. 극우민족주의자들의 행태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이전에 자기 민족에 대한 우월주의가 낳은 인류의 야만적인 과거사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신(神)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란 고정관념 때문에 유대족은 그 우월감, 배타성으로 하여 오랜 세월 타민족으로부터 소외되고 박해받았고, 게르만족 제일주의의 나치스는 인류 최대의 범죄를 남기고 붕괴했으며, 신국(神國)으로 망상한 일본 역시 최초의 원자탄 세례를 받”(일산, 174) 았던 과거사가 그것이다. 과거의 악몽이 여전히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고 또한 반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 민족에 대한 과잉 사랑이 낳은 배타적 민족주의는 버려야 할 유물이다. 그렇다고 민족에 대한 애정까지 버릴 이유는 없을 것이다. 자기 민족과 타민족을 비교하여 우위에 서려하기보다 자기 민족을 사랑할 줄 아는 자긍심이야말로 타민족에 대한 존중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런 이유에서 민족주의를 넘어 온전한 민족과 인류가 되기 위해서도 자기 민족과 인류의 역사를 ‘탐구(探究)’하며 인정하고 긍정하며 부정하는 지양(止揚)의 과정은 필요할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역사를 부정하는 일본에게 미래는 없다’는 박경리의 말씀은 일본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인류 모두가 새겨야 할 말씀일 것이다. ‘역사를 부정하는 인류에게 미래는 없다’ 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은 달라졌는가라는 물음 앞에서 그들의 군비확장 소식과 후쿠시마 방사능 오염에 대처하는 태도는 기후 재앙과 코로나 바이러스마저 잊게 만든다. 이러한 반응은 그들이 청산하지 못한 인류를 상대로 한 전쟁의 역사, 한민족 말살(抹殺) 정책의 역사 때문이다. 그들 내면에 감춰진 광기의 역사 때문이다. 일본이 다른 핵보유국과 다른 이유는 거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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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대신 인류라는 말을 쓰면 달라질까. 그럼에도 왜 민족인가. 그 물음은 일본에 반하는 반일(反日)의 이유는 무엇이었나, 혹은 왜 민족을 지키려고 했나, 우리는 무엇을 지키려고 했는가라는 물음에 이른다. 이에 대해 박경리는 민족을 지키는 것이기도 했지만 ‘영토’를 지키는 것이기도 했다고 말한다. “민족주의 반일의 동기와 민족주의 반일의 목적, 그것에는 다 사람의 생존을 저해하는 것에 대한 저항의 필연성이 있는 것이다. 즉 삶의 터전인 땅이 토지라는 소유의 개념으로 변하면서 역사는 투쟁과 전쟁으로 점철되어 왔고 작게는 개인에게 민족, 크게는 인류 모두가 피해자와 가해자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일산 69)
결국 ‘삶의 터전인 땅이 토지라는 소유의 개념으로 변하면서’ 전쟁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인류재앙이 시작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2,500여 년 전부터 약탈하고 약탈당하는 민족들의 싸움이야기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과학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발전을 거듭하여 지금에 이른 제국주의 전쟁의 역사, 식민지 시대의 서막을 알린 것이다.
원주민이 살고 있는 영토에 침략하여 점유하고 그들을 삶의 터전에서 내쫓거나 갈 곳 없는 이들을 자비(慈悲)의 이름으로 소유한다. 그렇게 인간은, 땅은 소유하고 투기하고 개발할 수 있는 사고 팔리는 상품으로 취급되며 파괴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땅’을 ‘강산’을 지키는 것 자체가 생사가 걸린 문제일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식민지배는 국가기관을 통해 과학적이고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또한 ‘자본기술과학’의 인류화 시대를 맞아 자유롭게 드나드는 제국의 침략과 지배는 더욱 용이해졌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인류재앙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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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은 개개 민족의 ‘삶의 터전’이다. 삶의 터전이 있어야 삶을 터전을 잘 가꾸고 지켜야 살아갈 수 있는 것이 ‘땅’ 일뿐이다. 박경리는 “우리는 우리 강산으로 인하여 생존이 가능한 것이며 따라서 내 강산을 지켜야 하는 바로 그것이 민족주의”(일산, 177)라고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 “땅에 인간이 종속된 것이 아닌, 인간에게 땅이 종속된 듯한 느낌”으로 말하는 일본인을 대하게 되면 그들의 호전성, 침략성을 상기하게 된다고 말한다.(일산 178)
‘땅’을 소유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사고를 가지고 있는 이상 빼앗으려는 침략의 불씨는 꺼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박경리의 반응은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비단 일본인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한 민족 간에도 ‘땅’을 소유하기 위한 전쟁은 한국에서 계급전쟁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러한 ‘약탈하고 소유하려는 감각과 의식’은 식민주의의 일상화이자 폐기되어야 할 제국주의의 유물인 것이다. 땅이 부의 원천인 이상 지키고 가꾸기보다 개발하다 훼손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지점에서 인류재앙의 해법을 찾을 수 있기도 하다. ‘땅’을 본래의 목적인 ‘삶의 터전’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기에 전쟁 아닌 전쟁 같은 전쟁이 인류의 일상이기도 하다. 그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 방안은 아니지만 일상적인 해결 방안으로서 근래에 제안되고 있는 것 중의 하나로 리처드 다스웨이트와 이머 오슈크루가 제안하는 “토지가격세(LVT)”를 참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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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은 한일합방을 전후해서 제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제국주의 식민지시대는 가장 가혹한 땅의 유린과 생명 학살의 도가니였고 살아남기 위해 민족주의의 불꽃을 간직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광복 후에 우리는 민족주의를 극복해야만 했는가라고 물을 수 있다.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 박경리의 생각이다. “세계의 현실은 여전히 약자의 호주머니를 강자는 털어내고 있으며 아흔아홉 섬의 곡식을 가진 자가 한 섬 가진 자로부터 빼앗아 백 섬을 채우려는 이것이 오늘날의 민족과 민족 간의 현실”(일산 70)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박경리는 영토의 침략보다 더욱 악성인 것은 “땅이 죽어가고 있다”(일산 70)는 사실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장본인은 “이득을 많이 챙기는 자들”이며 “많이 벌어들이는 만큼 땅을, 지구를 파괴하고 황폐를 재촉하고 이”다는 것이다.(일산 70) 그런 만큼 국제 사회에서 지구 파괴와 관련하여 더 많이 가진 자들에게 더 많은 책임을 묻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일본의 팽창주의는 과거와 다를 것이 없고, 그 해악도 다를 것이 없다고 말하면서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 혹은 무관심을 나타내는 일부 지식층의 이상주의 혹은 지성을 지적 허영으로 본다. 즉, “피해자가 불이익을 안고 과연 평등의 세계주의로 갈 수 있는 걸까? 허구요 망상”(일산 70-71)이라고 주장한다.
민족주의라고 비판하겠다면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자들이 과거와 얼마나 달라졌는지 면밀히 살피는 일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점검 없이 민족주의라고 비판할 경우 그들의 비판 역시 점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