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국민을 상대로 다양한 소송을 한다. 범죄, 조세, 경제규제 같은 영역에서 공공성을 침해하는 민간 행위자들을 상대로 한 소송의 승률은 국가의 질서 유지 능력을 표상한다. 하지만 그 유능함은 때로는 과거의 국가폭력에 희생된 피해자들이 제기한 소송에서도 발휘된다. 가해 사실을 일단 부정하고, 피해자에게 귀책 사유가 있음을 집요하게 파헤치고, 입증 책임을 다투고, 기계적 항소를 거듭하면서 일그러진 소송을 이어간다.
정부가 막대한 소송 비용을 지출하고 유능할 수 있는 이유는 시민들이 세금을 통해 국가 능력을 확보할 자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 능력으로 오랫동안 소외되어온 국민들의 권리를 법률대리인을 통해 부정하는 소송을, 그것도 1심에서 패소한 소송을 2심·3심까지 끌고 가는 행동에서는 관료주의적 관성 외에 무슨 대단한 공익이나 명예를 찾을 수 없다. 많은 예산이 투입될 선례가 될까 두렵다는 논리는 국가의 폭력이 얼마나 만연했었는지를 드러낼 뿐이다.
정부는 국가권력의 피해자들, 여전히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이들과의 소송을 자제해야 한다. 1심 판단을 받아볼 때는 국민과의 승부가 아니라 법적 사안들을 공적으로 검토받는 과정으로 삼고, 항소가 아니라 정책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정부가 승소해도 마찬가지다. 끝끝내 국민을 현재의 법리로 이기려 하기보다 미래를 지향하는 정책을 통해 그들의 권리를 보장하고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피해자들이 절망적인 마음에 차라리 소송을 택하려 하지 않을 정도로 실질적인 보장과 명예 회복을 동시에 담아야 한다.
-경향신문, 2025. 7. 13. 기사 <국민의 슬픔과 싸우지 않는 나라> 중에서
“정부는 국민을 상대로 다양한 소송을 한다”
나에게 위 문장은 '정부와 국민', 둘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둘은 적대적 관계인가, 둘은 서로에게 요구하고 요청하는 일방적 관계일 수 있는가.
이러한 생각과 물음을 갖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정부는 국민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관념’ 때문인 듯 싶다.
그러니, 나의 ‘관념’에서는 정부가 ‘총칼’로 국민 위에 군림하려 드는 행위는 말할 것도 없고, 정부가 법으로 국가 폭력의 피해자 국민과 대결하여 승리하려는 행위도 ‘민주공화국’이라는 정부의 성격을 부정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정부가 막대한 소송 비용을 지출하고 유능할 수 있는 이유는 시민들이 세금을 통해 국가 능력을 확보할 자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시민의 세금에 의해 주어진 비용, 능력, 자원으로 시민에게 소송을 하는 둘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는 것인지, 그것이 최선인지 이해하려는 것이겠다.
정부의 모양은 다양할 수 있다고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도 있겠으나, 다른 모양의 다양한 정부도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국민의 슬픔을 헤아리고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는 나라’까지는 아니더라도 “국민의 슬픔과 싸우지 않는 나라”, “피해자들에게 정의의 마지막 보루가 되는 나라”, “소송이 아니라 정책으로 반응하는 나라”
정부와 국민, 둘의 관계를 그렇게 이해하고 있고, 그렇게 이해하려 한다.
2025. 7. 14.
[정동칼럼]국민의 슬픔과 싸우지 않는 나라 -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