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히 나를 위한 여행.
회사 스트레스가 극도로 심하던 시기의 어느 날,
느닷없이 눈물을 터뜨린 나를 달래주던 남편이 긴 휴가를 권유했다.
너무 힘들면 그만두면 되지만, 길게 쉬고 리프레시 된 마음으로 차분하게 여러가지를 생각해보는 것도 도움이 될거라고.
이미 연초부터 너무 힘들어 연차를 야금야금 많이 썼기에 남은 연차를 전부 써버리는 게 싫었지만, 어차피 그만둘 것이라면 상관이 없지 않냐는 말에 공휴일을 끼고 2주를 쉬기로 했다. (비행기표가 가능한 싼 날짜를 잘 골라서..!)
우선 연차부터 내고, 비행기 표를 끊은 후에야 뭘 할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길게 쉬는 것도 쉽지가 않으니 혼자서 어디 멀리 여행이나 다녀오면 좋을텐데.
오랜만에 뉴질랜드를 가고 싶었지만 물가나 비행기 값을 생각하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일본을 생각했는데, 가까운 나라이지만 마지막으로 갔던게 2006년 쯤이라 사실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너무 새로운 곳은 혼자 가기에 약간 두렵기도 하고 그렇게 도전을 즐길만한 정신 상태도 아니라, 괜시리 마음이 좀 더 편한 이웃 나라로 가기로 결정했다.
혼자서 여행을 떠나본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언젠가 남편이 사우디에 이삼주 쯤 갔을 때 국내 여행을 짧게 다녀왔던게 아마 4-5년 전 쯤이었던 것 같다.
나는 보통은 계획을 즐겨하는 파워 J이지만 특이하게 여행 계획 짜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데다가 사람들이 붐비는 곳은 싫어해서 대체로 즉흥적으로 여행을 다니는 편이다. 이번에도 오사카로 지역을 정한 이후에는 아주 대강의 플랜만 짜고 가서 마음 가는대로 다니기로.
넓은 일본에서 오사카를 가기로 결정한 이유 중 첫번째는 유니버설 스튜디오.. 예전부터 해리포터와 마리오가 있는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마침 가는 일정이 일본 휴일과도 겹쳐서 익스프레스 패스를 구할 수 없어 포기) 그리고 혼자 다니기에는 아무래도 도시가 편할 것이고, 근처에 교토나 나라도 쉽게 기차나 전철로 닿는 거리에 있어 좋아보였다.
캐나다에 처음 갔을 때는 영어를 못하고 일본어는 어느정도 할 줄 알아서 거의 일본 친구들이랑만 어울릴 때도 있었는데, 안쓴지 너무 오래라 전부 잊어버린 탓에 부랴부랴 여행용 일본어 공부도 시작했다.
그리고 원래는 혼자 다녀올 계획이었지만 전부터 일본을 가보고 싶어했던 남편을 두고 가는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어, 혹시 연차 낼 수 있으면 며칠 같이 여행하고 싶은지 물어보았다. 남편은 '여보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데 자기가 끼면 안된다'고 고사하다가 내가 재차 물어보자 수줍게 기뻐하며 나만 괜찮다면 가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수정한 계획은 나 혼자 먼저 가서 이틀, 삼일 째 되는 날 점심 쯤 남편이 오사카 시내에서 합류, 5일 함께 여행 후 한국으로 같이 귀국하는 것이었다. (현지에서 내가 일정을 연장하여 며칠 더 남아있기로 해서 남편은 혼자 귀국하게 되었긴 했지만)
사우디 여권을 지닌 남편은 일본 여행 비자가 필요해서 (당시 출국 3주 정도 남은 상태) 급히 비자 서류 알아보고 여행 비자를 신청했다. (일본 비자는 대사관에 직접 신청이 안되고, 대사관에서 지정한 여행사들 중 하나를 통해서 신청해야만 했다.)
어느새 출국일. 지방에 사는 나는 집에서 김포까지의 여정을 생각해 오후 비행기를 예매했었고, 고속버스로 충주-고속터미널역, 지하철로 김포공항역까지의 1차 여행을 떠났다.
그동안 준비한 것은 벼락치기 여행 일본어 공부, 대강의 갈 곳 조사, 트래블로그 카드 발급과 환전, 버스/지하철을 탈 수 있는 모바일 스이카 카드 설치, 그리고 호텔과 에어비앤비 예약 정도였다. 꼭 필요한 건 그래도 준비한 듯.
이동의 편의를 위해서 캐리어를 들고오지 않았고, 약간 큰 배낭 하나만 들고 떠났다. (필수품과 두세벌의 옷이 전부. 코인 런드리나 에어비앤비의 세탁기로 종종 빨래를 할 예정!) 하지만 나중에는 기념품 등으로 짐이 늘어날 수 있으니 여분의 천가방 하나는 챙겼다.
우리집 근처에는 내 주거래 은행이 없기도 하고, (인천 공항만 생각하고) 공항 가면 은행이 있을테니 거기서 비상금으로 엔화를 약간만 인출해서 가자고 생각하고 김포 공항에 도착했다. 그런데 김포 공항은 국제선 공항도 정말 작고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직접 가서야 알게 되었다.
평일이기도 했지만 정말 사람이 없어서 출국 수속 등 모두 빠르게 진행되었다. 점심이라도 미리 먹고 들어올걸, 안에는 식당도 거의 없고 매우 작아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 생각보다 너무 빨리 들어오게 되어 탑승 전 두시간 정도 시간이 있었고, 놀랍게도 카페다운 카페가 있어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직 한국을 떠나지 않았음에도 혼자 해외 여행을 하는 것에 대해 긴장이 되었다. 하지만 모든 일상에서 벗어나 오롯이 나 자신하고만 시간을 보낼 예정이라는 것이 기대되기도 했다.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내가 뭘 먹고 싶은지, 내가 어딜 가고 싶은지 - 다른 어떤 것도, 다른 누구도 생각하지 않고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
혼자 다른 나라로 떠나면서 피할 수 없는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은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일본에서 데이터를 사용하기 위해 미리 온라인으로 구매해둔 e-SIM이 잘 작동이 될지, 현금이 없는데 트래블로그 카드 하나로 정말 결제가 잘 될지, 모바일 스이카 카드가 잘 될지, 길 잃지 않고 숙소는 잘 찾아갈 수 있을지.
그냥 다 잘 될 것이라고 믿어보기로 했다. 미리 더 조사해볼 수는 있지만, 나의 여행이 '이미 인터넷에서 본 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여행이 되지 않았으면 했다. 어차피 여행자이니까, 실수도 하고 버벅거리기도 하고 도움도 요청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노멀'에서 벗어나더라도 타인의 평가에 크게 신경쓰지 않을 수 있는 게 여행자 신분의 큰 매력 중의 하나가 아닐까?)
그렇게 긴장과 기대감과 약간의 걱정을 안고 오사카행 비행기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