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엘라엘라 Sep 11. 2020

Chapter 1. 스물둘, 번아웃

빠른 게 무조건 좋은 줄 알았다


생일부터 나는 빠른 년생이다. 난 3월에 태어났다. 하지만 산부인과 기록 말고는 내가 3월에 태어났다는 걸 알 수 있는 길이 없다. 출생신고를 할 때 음력 생일로 따져 주민번호에는 2월생으로 등록되어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1월 1일부터 12월 31일 생까지 한 교실에서 수업을 듣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3월 1일 생부터 다음 해 2월 29일생까지가 친구였다. 다음 해 태어난 아이들은 ‘빠른’이란 단어를 붙이면서 애매한 족보가 만들어졌다. 족보가 꼬이건 말건, 엄마는 날 학교에 일찍 보내는 게 목표였다. 사회에서의 1년을 세이브할 수 있다는 게 이유였다. 


학교를 일찍 가서 다들 고 2 때 받는 주민등록증도 난 고 3이 되어서야 나왔고, 대학도 19세에 들어갔다. 

그렇게 1년을 앞섰다. 


대학을 가는 것도 빠른 게 좋은 거라고 했다. 재수를 못한 이유가 그거다. 나이를 먹는다는 거. 

부모님은 멈추지 말고 남들과 같은 페이스로 달리는 게 최선이라고 했다. 학교가 마음에 안 들면 좋은 대학원에 가라고 하셨다. 부모님이 원하는 대학원은 의사가 되는 길로 연결되는 의학전문대학원 말이다. 

 

원하는 수능 성적도 안 나왔고, 대학도 원하는 곳에 가지 못해 이미 힘이 빠져있고 쉬고 싶었다. 

그럴 때마다 듣는 말은 딱 하나였다. 

“딸, 한 번에 합격해서 대학원 4년 공부 끝마쳐도 겨우 스물여섯이야.
스물여섯에 넌 높은 단계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거라고.
그게 얼마나 앞선 시작인지 아직 넌 몰라.”        


어린 나이에 뭔가 이뤄놓는 건 대단한 거라고. 그러니 쉬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신입생이 되자마자 또 입시가 시작되었다. 

대학원 진학에 필요한 선수과목, 최소 학점 관리, 어학 영어를 준비했다. 의학전문대학원 진학에 더 유리하다는 과로 전과도 했다.   




행복은 사치다


내 다이어리 맨 앞장에 써놓은 문구였다. 

행복하면 내 꿈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힘들고 불행하다고 느껴지는 건 나중에 다 보상받을 거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고등학교 때 문과였던 내가, 갑자기 생물 전공을 하려니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전과까지 해서 겨우 뒤꽁무니 따라가느라 누구보다도 머리는 복잡했지만, 성과는 보잘것없었다. 


당연히 대학 생활다운 대학 생활은 없었다. 동아리도 봉사활동 스펙을 쌓을 수 있는 걸 찾아서 했고, 축제는 참석을 꼭 해야 하는 행사에만 갔으며, 방학 때는 농활이나 해외여행 대신 스펙을 관리하는 기간이었다.


지루한 대학생활은 어느덧 3년이 지났고, 나이는 스물두 살이 되었다. 대학원 입학시험은 4학년이 되는 다음 해 8월이었다. 조금만 더 불행을 견디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3학년 2학기가 끝나갈수록 두려워졌다. 


‘시험에 떨어지면?’


이 불행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고, 불행들에 대한 보상은 원래부터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일탈을 꿈꾸다 


시험이 아니면 다음 플랜은 없었다. 머리를 쥐어짜 봐도 뭘 해야 할지 몰랐다. 잘하는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아무 생각도 없었다. 힘들다고 불평할 줄만 알지, 포기할 용기도 없었다. 

 

여느 때처럼 복잡한 마음으로 일단 도서관에 갔다. 그리고 정말 우연찮게 게시판에 해외 인턴쉽 공고를 보게 되었다. 한 학기 동안 호주에 인턴쉽을 하면서 해외 커리어를 쌓아보라는 게 취지였다. 시험을 보지 않을 좋을 변명거리가 될 것 같았다.


인턴쉽 설명회에 다녀오고 나니 이 불행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고, 난 지원하기로 했다. 신청한다고 모두가 갈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당장 시험에서 숨을 수 있는 곳은 이거밖에 없었다. 곧바로 부모동의서를 들고 아버지께 갔다.  

 

스무 살이 넘었으면 성인인데, 결정하는데 무슨 부모님 허락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경제적 독립이 완전하지 않으니 반쪽짜리 성인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의 진로는 나를 포함해 가족의 번영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니 나의 진로 변경은 곧 교육 투자의 실패였던 것이다

     

“아빠, 대학원 시험에 필요한 영어 점수가 도저히 나오질 않아.” 

“학원 보내달라는 거야?” 

“아니, 인턴쉽 프로그램이 있어서, 호주에 다녀오면 영어가 좀 늘까 싶어.”

“시험 준비하는 애가 갑자기 무슨 외국에 나간다고 그래?”      


아버지의 반응은 예상한 그대로였다. 그리고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도 맞았다. 취업 준비를 해오지 않은 나는 인턴쉽은 쓸모없는 빛 좋은 개살구였다.  (실제로도 지금까지 인턴 경력이 도움이 된 적은 없다) 하지만 확실한 건 시험 준비를 할 능력도, 마음도 없었기에 무슨 말을 해서든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내야만 했다.      





매주 금요일에 업로드 됩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