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끄러지지 않을 순간을 위해
나는 사람을 좋아한다.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한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는 신이 나서 얼굴이 발그레해지고 웃음소리도 커지고 목소리톤도 높아진다. 그리고는 재잘재잘 떠들어댄다. 내가 신이 나서 떠들기 시작하면 남편은 옆에서 늘 조마조마해한다. 집에 돌아와서는 살짝 거슬렸던 말들에 대해 조심스럽게 이야기해 준다. 혹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거나 부담이 되지는 않았는지. 상대방에게 찔리는 말이나 자랑하는 말은 아니었는지, 아는 척하며 가르치려 들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보라는 의도이다. 나는 기분이 나빠져서 또 잔소리라며 핀잔을 준다. 남편은 나보다 예민한 편이라서 항상 디테일에 신경을 많이 쓴다. 그리고 상대방의 감정도 잘 파악하는 편이다. 결혼하고 같이 살면서 별로 그런 일이 없었는데 나이가 들어 진짜 아줌마가 되어 말이 많아지기 시작하면서 남편의 잔소리가 시작된 것 같다. 나는 원래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정말 아줌마가 되었는지 요즘은 용감해지고 말도 많아졌다는 말도 가끔 듣는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말하는 것이 조심스러워졌다.
남편은 늘 이렇게 말한다.
연세 드신 분들에게 내가 나이 들어서 어떻다는 말 금물.
아이가 없는 분들 앞에서는 묻기 전에는 아이들 이야기는 금물.
자녀문제가 잘 안 풀리거나 아픔이 있는 친구들에게는 자녀자랑은 금물.
경제적으로 힘들다는 이야기도 상대방에게 부담을 줄 수 있으니 금물. 그 반대도 금물.
남 흉보거나 판단하는 말도 금물.
남편 흉이나 아이들 흉도 나중에 내 흉으로 돌아올 수 있으니 금물.
쓸데없는 오지랖으로 하는 충고 금물.
생각 없이 무슨 일을 같이 하자거나 같이 여행 가자는 부담스러운 제안도 금물. 등등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서 내가 오죽하면 잘하겠냐며 큰소리치면서 잔소리 그만하라고 반박했다. 편한 사람들 만나서 이야기하는데 이것저것 따지면 할 이야기가 뭐 있냐고. 힘든 이야기도 하고 자랑할 일이 있으면 자랑도 하고 남 흉도 조금 봐야 사람 만나는 재미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한 번씩 생각 없이 내뱉었던 말들이 사람들에게 상처가 될 수도 부담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분이 나를 찾아와서 다른 사람과의 대화이야기를 한다. 상대방이 농담처럼 한 아주 별것 아닌 말 한마디가 상처가 된다고. 자신을 두고 한 말도 아닌데 왠지 기분이 안 좋다고 했다. 내가 생각해도 그냥 생각 없이 내뱉은 말 같은데 그분이 밤새 왜 나에게 그런 말을 했을까 고민하는 걸 보니 말이라는 것이 점점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도 아는 지인을 만나러 나갔다가 이야기 도중 하마터면 쓸데없는 충고를 하려다가 멈춘 순간이 생각났다. 잘 걷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마터면 미끄러질뻔한 순간이었다. 잘 가다가도 순간 발을 잘 못 디뎌서 미끄러지거나 계단을 내려가다가 높이감각을 잃어 순식간에 미끄러지거나 넘어지는 일이 생긴다. 그러면 상처가 생기겠지. 그 상처가 되는 미끄러지지 않을 순간을 위해 나는 오늘도 말을 아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