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보다 더 긴 하루를 보내기 위해
헤밍웨이의 책들은 내가 대학교 때 좋아했던 책들이다. 30년도 더 된 일이라서 그때 왜 헤밍웨이의 책들에 꽂혀서 도서관에 틀어박혀 열심히 읽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무슨 이유가 있었겠지.
요즘 나는 예전에 읽었던 책들이나 영화들이 다시 보고 싶어진다. 그때는 깨닫지 못했던 내용들이 지금 어떻게 읽힐지 궁금하기도 하고 철없고 생각 없던 대학시절을 돌아보며 그때 몰랐던 것들이 이제는 눈에 들어오는지 확인해 보고 싶기도 했다. 괜한 잘난 척으로 명작이라는 책들을 찾아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읽곤 했는데 왜 그 책들이 명작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럴때는 내 무지가 들통날까 아는 척 이해한 척 하기도 했다. 이제는 그 명작들의 책 내용도 가물가물하고 희미하게 느껴진다. 어떤 책들은 지루해서 끝까지 다 읽지도 못한 것도 있었다.
나이가 들어 경험도 쌓이고 생각의 폭도 쪼끔은 넓어져 삶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 덕분인지 책을 읽으면서 줄 치는 문장의 수가 점점 늘어난다. 마음속으로 달려 들어오는 이야기가 많아진다. 책 속 삶의 이야기들이 마치 나 좀 봐달라고 아우성치며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그때는 그냥 지나쳤을 문장들이었는데, 이제는 우리의 가슴을 아득하게도 하고 후회하게도 하고 앞으로 살아갈 삶을 안내하기도 한다. 아주 오래전에 쓰인 삶의 이야기들이 여전히 지금까지 감동을 주는 걸 보면 우리의 삶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고, 여전히 감동을 주는 글을 써낸 작가들의 작품들이 명작인 것은 확실하다.
데미안을 다시 읽었을 때도 천로역정을 읽었을 때도, 지금 모든 책을 다 나열하기는 어렵지만, 그 책들이 왜 명작이어야 하는지 수긍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첫 장을 넘기는 순간부터 마지막까지 마치 우리의 삶을 누가 훔쳐보고 쓴 글인 것 같아 숨죽이며 읽어간다. 한 구절 한 구절이 나에게 온다.
오랜만에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으면서 그때 어떤 감동을 받았는지 다시 기억해 내리라는 다짐을 해 본다.
이 책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책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위한 건 아니다. 말하면 뭐 하랴. 벌써 수없이 많은 이야기들과 감상문들이 인터넷에 떠돌고 있는데.
인터넷에 노인과 바다 명언만 치면 좋은 구절들이 줄줄이 나오니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근데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초반부터 별 것 아닌 구절에 깊은 공감이 되었다. 아마도 내가 나이 들어간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노인은 잠이 없어서 늘 소년을 깨워준다. 그날도 소년은 자명종 같은 노인에게 아침에 깨워달라고 부탁을 한다. 아이들은 잠이 많으니까.
노인들이 왜 일찍 깨는 걸까 라는 질문에 스스로 대답한다.
"남들보다 더 긴 하루를 보내기 위해서?"
정말 더 긴 하루를 보낼 수 있다면...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나이가 드니 시간이 정말 빨리 간다.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가고 일주일은 눈 깜짝할 사이에 내 시간을 삼킨다. 나는 늘 시간이 아깝다. 더군다나 시간관리에 의지박약인 나는 늘 게으름과 시간과의 싸움에서 지고 만다. 도대체 누가 노인은 잠이 없다고 했는지... 누가 갱년기여성이 잠이 없다고 했는지... 나에게 적용되는 말은 아닌 듯하다. 나는 못 자도 8시간은 꼭 자야 하는데 잠이 부족하면 몸도 정신도 희미해지고 맥을 못 춘다.
남들보다 더 긴 하루를 살기 위해서는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그것도 쉽지가 않다. 밤늦게까지 일을 하고 돌아와서 겨우 2-3시간 내 시간을 가질 수 있는데 새벽은 왜 이렇게도 빨리 오는지...
조금만 아침이 길었으면 좋겠다. 조금만 밤이 길었으면 좋겠다. 쓰고 싶은 글도 충분히 쓰고 보고 싶은 영화도 느긋하게 보고 싶다. 하고 싶은 일도 많고 배우고 싶은 것도 많다. 젊어서 뭔가를 잘 배울 나이에는 아이들 키우랴 일하랴 공부하랴 하고 싶은 것은 엄두도 못 내고 살았다. 이제는 그때 해 보지 못한 것들을 하고 싶지만, 여전히 시간에 쫓긴다. 사실 지금은 뭘 해도 잘 배울 수 있는 나이는 아니라 시도조차도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래도 시간이 많았으면 좋겠다 그 시간 동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해 보고 싶다. 마음껏 게을러도 보고, 마음껏 글도 써 보고, 마음껏 책도 읽고, 마음껏 영화도 보고, 여행도 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노인이고 싶진 않지만 일찍 깨는 사람이고 싶다. 일찍 깨어서 남들보다 더 긴 하루를 보내고 싶다. (하지만 긴 하루는 내 게으름 때문에 여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