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저녁 운전을 하던 중이었다. 라디오에서 이오공감의 ‘한사람을 위한 마음’이 흘러 나왔고 한동안 멍하니 노래를 들었다. 1절이 끝났을 무렵 나는 괜스레 슬퍼졌다. 정확한 감정을 설명할 순 없지만 대략 10년전 이 노래를 함께 듣던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이 더 이상 생각나지 않아서였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때만큼 열정적이지 못하며 현실에 지독하게 찌든 내 자신을 백미러로 확인했을 때 벌써 차는 아파트 주차장 앞에 도착해 있었다.
집에 들어가기 전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도 하소연을 했고 친구도 하소연을 잔뜩 늘어놨다. 요즘 우리의 대화 주제는 사회생활과 독신의 삶이다. 친구는 회사에서 받는 업무 스트레스로 밤마다 혼술을 하며 자주 운다고 했다. 애인과 헤어진지도 1년이 다 돼 가니 마음도 허전하고 삶의 낙이 없다고 우는 소리를 한다. 내가 오늘 겪은 일을 늘어놓으니 당연한 현상이란다. 20살의 연애 혹은 그때의 나를 떠올리면 당연히 지금과 괴리가 있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확실한 건 지금의 나와 그때의 나는 많이 다르다. 전혀 다른 사람인 것 같기도 하다. 10년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고 너무 많은 것들이 새로 생기고 사라지고 변했다. 그 과정을 겪으며 내가 느끼는 감정의 결 자체도 변해버린 탓일까. 요즘 나는 연애를 떠나 모든 일에 처음 같은 뜨거운 무언가를 느끼기가 힘들다.
이 처럼 혹자는 무뎌지는 것이 어른이 되는 과정 중 하나라고 한다. 내가 느끼는 감각에 무뎌지면 작은 일에 상처받지도, 크게 감동받지도 않을 터. 그게 어른다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사회생활을 함에 있어서 감정을 배제하는 건 큰 도움이 되는 듯하다. 갑과 을의 계약관계에서 이뤄지는 모든 생산 활동은 냉정하기 짝이 없다.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받기 쉽고 가뜩이나 무뎌지는 감각들에게서 더욱더 도망치고자 노력하곤 한다. 사회생활을 오래한 사람이라면 사회에서 나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모든 일에 열정적으로 감정 소모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쉽게 알아차릴 것이다.
그러나 점점 무뎌지다보면 정확히 자신의 감정이 어떤 상태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조차 헷갈리는 때가 온다. 나 자신을 알아가는 게 삶의 궁극적 여정이다. 이를 위해 배우고 느끼며 실패하고 다시 일어서는 것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 자신과 멀어지는 현재의 상황이 꽤나 역설적이다.
확실한건 삶은 녹록치 않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고 규정해 버린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말처럼 각자가 처한 상황과 처지에 맞게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는가. 요즘 개천에서 용 나기 어려운 이유는 비단 부모의 경제력만은 아니다. 전자가 수행되기 위해선 감정에 솔직할 필요가 있다. 즉 세상에 맞서 예민하게 반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 없이 맞이하는 문제들을 피하지 않고 온몸으로 부딪히고 그 속에서 겪었던 감정을 오롯이 곱씹어보면 내가 좀 더 나다울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나만큼은 무뎌지고 싶지 않다. 나이 들어서도 솔직하게 나 자신의 감정과 대면하고 상처받으며또 다시 아물기를 반복했을 때 비로소 온전한 나 자신의 주인이 된다. 그렇게 나이 들고 그렇게 어른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