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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보 Mar 24. 2022

인생이 지루한 당신에게 추천합니다

아이돌 덕질을요

부제 : 아이돌 덕질 추천이라 쓰고 아이돌 덕후의 항변이라 읽습니다.




"넌 대체 몇 살까지 그러고 살 거니?"


내가 좋아하는 그룹이 '아이돌'인지도 몰랐던 초등학생 시절, 세상이 '아이돌' 위주로 돌아가는 게 당연했던 중학생 시절, '아이돌'이 꿈이 되어버린 고등학생 시절.

이 기나긴, 길다 못해 심지어는 조금 지루한 '빠순이' 역사를 바라본 엄마가 최근 제일 자주하는 말이다.


대학 졸업을 했대도 이상할 게 전혀 없는 나이가 된 지금도 변치 않는 티비 속 - 이제는 유튜브 속이 좀 더 맞게 되어버린 - 연예인을 좇는 시선과 애정. 연예인을 열렬히 좋아해본 적 없는 사람 입장에선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취미일 테다. 취미쯤으로 인정해주면 차라리 다행이다. 취미라기보단 어린 시절 철 없을 때나 하는 치기로 이해되는 게 아이돌 덕질이다.


그런 지루한 시선을 던지면서 혹자는 걔들이 밥 먹여주냐고 묻고, 혹자는 사귈 수도 없는 애들을 왜 좋아하냐고 묻는다.


이쯤 되면 여러분도 묻고 싶어질 게 분명하다.

이토록 무시 당하고, 어디 가서 말하기도 남 부끄러운 걸 대체 왜, 누구한테 추천하는데?


아이돌 덕질을 취미로 삼은지만 15년.

고인물 김하보의 답변은 아래와 같다.








과몰입이 피곤한 당신이라면, 한 번쯤?


업무 카톡에 열받아 김이 날 때쯤, 버블 알림이 울린다. 최애다. 오늘 연습이 힘들었다고 재롱을 피운다. 셀카를 보냈다. 오늘도 예쁘다. 분명 두 시간 전까지만 해도 월 4500원이 아까웠는데, 내달에도 구독을 연장해야겠다 다짐한다. 메세지 한 번에 일하다가도 미소가 지어진다. 씨*! 당연이 그까짓 돈 내 최애를 위해서라면 내줄 수 있지! 모드가 된다.


터벅터벅, 지친 퇴근길에 이어폰을 꽂고 오늘의 무대를 보고, 오늘의 귀여운 최애를 본다. 다시 기분이 좋아진다. 트위터 탐라가 온통 시끄럽다. 시상식 투표? 스트리밍? 그건 그냥 돈으로 하면 된다. 넘긴다. 최애가 올려준 커버 음원을 재생한다. 최애 목소리 하나만으로 만원 버스가 조금은 살 것처럼 느껴진다.



많은 이들이 착각하는 것들 중 하나가 바로 아이돌 덕질은 모두 매우 깊은 몰입을 기반으로 할 거라는 선입견이다. 그도 그럴 게, 아이돌 덕질하는 중고등학생이 아이돌 팬의 전형이라면 그럴만하다. 별로 중요해보이지도 않는 것들에 불처럼 화를 내고, 눈물을 흘리고, 때로는 다른 팬덤과 싸우기까지 하고.

필자가 그러던 시절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대충 열여섯, 열일곱 쯤엔 필자도 그러했다. 좋아하는 가수가 시상식에서 큰 상을 타면 멤버들보다 더 울었고, 다쳤다고 하면 하루종일 그 생각만 했다. 트위터에 구구절절한 사랑의 편지를 2분에 한 개씩 써내리는 건 덤.


미안하지만 이십대에 들어서고 나서는 그럴 힘이 없다. 내 인생을 살아가는 것만으로 치열하다. 더는 고민하기 싫다. 내가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일상을 환기시켜줄 박카스지, 입에 쓰고 몸엔 좋은 고삼차가 아니다.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과몰입을 지양하고, 나는 나 너는 너, 그런 마음으로 살아나간다. 핸드폰 열어 터치 두어 번 하면, 고된 현실을 잠시 잊게 해주는 마취제를 맞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노래 한 곡은 4분이면 끝난다. 길어야 6분 내외다.

노래를 듣고 무대를 보는 데에 드는 시간도, 노력도 압도적으로 적다는 얘기다. 접근이 쉽고, 몰입이 쉬워 동시에 빠져나오기도 쉽다.

무언가에 깊이 몰입하는 것 자체가 피곤함으로 다가오는 현대인들에게 적격인 취미다. 취향인 노래 몇 개 듣고, 취향인 무대 몇 개 보고 나면 대략 30분쯤 흘러 있다. 그러고 나면 다시 기분이 좋아진다. 생각이 단순해지는 것이다.


드라마, 영화, 뮤지컬, 연극, 뭐가 어쨌든 사람을 녹진하게 몰입시켜버리는 취미들은 때로 과할 때가 있다. 머릿속을 온통 그 내용으로 절여버린다. 그러면 필자는 삶을 살아가는 것 말고, 그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벌써 지치기 일수였다. 머릿속을 환기하고 단순한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때, 아이돌은 훌륭한 도구가 된다. 화려하고 시끄러운 무대는 잠시간 생각을 지우고, 마비시킨 뒤 기분 전환을 돕는다.


놀라운 사실.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열정적인 10대 팬들도 이제는 별로 없다.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팬덤의 한국인들은 대부분 최소 20대 이상이다. 요즘 애들은 아이돌에 관심 없다. 그 시간에 틱톡을 하고 유튜버를 좋아한다.

어설프지만 돈 버는 사회인이 된 날 위해, 맛있는 간식과 식사에 돈을 투자하는 것보다 쬐끔 더 쓰는 것뿐이다. 조금 비싸고 맛있는 간식을 자주 먹기 위해 쓰는 돈이라고 생각하면 별로 아까울 것도 없다.








이것저것 다 맛보고 싶다면, 한 번쯤?


아이돌 산업과 다른 음악 산업의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점은, 무엇보다 '종합성'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k-pop 아이돌 앨범 하나를 내려면 준수한 음악과 퍼포먼스는 기본이요, 거기에 비주얼적 트렌드 - 멤버들 헤메코나 앨범 디자인 - 고려해야 하고, 그걸 홍보하기 위한 자체 예능 컨텐츠도 만들어야 하고, 뮤직비디오는 기본, 트랙비디오 외에도 세계관을 담은 아트 필름 등이 필요하다. 정말 안 건드리는 분야가 없단 거다.

게다가 이걸 어설프게 했다간 욕이나 먹으면 차라리 다행이지, 아무도 그들의 데뷔나 컴백 사실을 모르는 채로 활동이 종료되는 일도 부지기수다.


그 말은 곧, 아이돌에 관심을 가지면 무엇보다 손쉽게 요즘의 종합 트렌드를 알 수 있다.

일례로 들어보자면, 아이돌이 컴백할 때 입는 의상으로 패션 트렌드를 알 수 있고, 컴백할 때 들고 나온 곡들로 세계 음악 트렌드를 알 수 있으며, 안무 구성을 보다보면 대충 뭐가 어떤 춤인지 알게 된다. 잘나가는 댄서나 안무가를 알 수도 있다. 하다못해 자체 콘텐츠에서는 요즘 뜨는 예능적 코드나 밈을 알 수 있다. 모든 트렌드의 정점을 아이돌 그룹 하나 좋아한다고 자동적으로 익히게 된다. 실제로 패션이든 영상 트렌드든 그런 거 잘 모르는 나도 아이돌 좋아하면서 익히게 된 게 제법 많다. 게다가 핫한 아이돌을 좋아하게 되면, 각종 브랜드에서 자동으로 협찬을 해준다. 그뿐인가, 화보도 찍고 가끔은 앰배서더가 되기도 한다. 프라다, 디올, 미우미우, 루이비통, 그런 하이 패션 브랜드의 컬렉션이나 화보를 챙겨보게 될 줄은 몰랐던 일이다.


새로운 미디어 플랫폼 경험도 또래의 다른 사람들보다 빠르게 해볼 수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오래인 내가 대체 틱톡과 유튜브 쇼츠, 인스타그램 릴스 기능을 왜 이렇게 빠삭하게 아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트렌드에 밝냐고 묻는다. 답은 간단하다. 최애 보려면 깔아서 익혀야 된다. 최애가 틱톡 챌린지를 올리고 그걸 인스타 릴스에 공유한다. 세계와 소통하는 것이 거의 필수 덕목이 된 현재의 케이팝 아이돌들은 누구보다 빠르게 새로운 플랫폼에 적응하는 건 물론이오, 활용할 줄도 알아야 한다. 사소하지만 여러가지 경험도 해볼 수 있다.


그뿐이냐, 파생되는 팬 문화의 양과 소속감도 아이돌은 어마어마하다.

이건 어디까지나 선택의 영역이고, 공식의 영역은 더욱 아니기 때문에 이에 대한 감흥은 별로 없는 사람들이 많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아티스트나 회사와는 무관하게 팬들 자체적으로 창작하거나 즐기는 문화들이 있다. 그림이나 게임으로 하는 팬아트나 커뮤니티는 물론이오, 아이돌 팬덤에서 유행시키기 시작한 생일카페 문화 등도 그에 포함될 테다. 단순히 같은 사람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한 집단에서 무조건적인 환영을 받고, 모르는 사람과도 친하게 지낼 수 있는 일은 쉬운 건 아니다. 생일 카페나 콘서트, 팬미팅에 가면 나와 같은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 수십, 때로는 수천 명이 있다. 낯선 곳에서 만나는 낯선 사람들이 그토록 친숙하고 친근하게 느껴지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여러 가지를 두루 경험해볼 수 있다는 측면에서, 아이돌 덕질은 생각보다 현실에서 도움이 되는 취미이기도 하다. 미디어 콘텐츠 영역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썩 와닿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아이돌을 덕질하면서 얻은 여러 가지 트렌드 지식을..실제로 업무에 써먹어본 적도 있다. 게다가 팬 문화도 가끔은 도움이 된다. 팬들과 만나 나눔하는 능력자 팬이 되어보려고 포토샵을 배우고 프리미어를 배우기도 했다. 동기 부여가 되어줄지도 모른다는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이돌 덕질은 다른 취미와 같은 레벨의 취미로 받아들여지지 못한다.

혹자는 유치하다 비난하고, 돈이 아깝지 않냐고 묻기도 한다. 혹자는 상업성이 다분한 아이돌 문화를 어떻게 다른 종류의 예술을 향유하는 것과 같다고 보냐고 비판한다. 그런데 그러면 뭐 좀 어떤가. 다른 사람이 날 어떻게 보느냐가 언제부터 중요했다고.

좋아하는 것에 내가 번 돈을 쓰고, 그걸로 잠시 기분이 좋아지고, 별 거 아니고 그게 다 돈을 벌기 위한 콘텐츠란 걸 알면서도 돈을 다시 쓰고. 그게 뭐가 어때서, 하는 마음만 있다면, 생각보다 아이돌은 가성비 덕질일지도 모른다. 그 어떤 취미보다 허들 낮은 미친 접근성과 그 어떤 취미보다 종합적인 정보를 주는 다양성이 있는데.



그런다고 걔네가 널 알아주냐?

그런다고 돈 한 푼이 나오냐?


몰라줘도 된다. 뭐 야구 좋아하고 축구 좋아하는 사람들은 구단이 팬들 알아주길 바라서 응원하나? 뭐 뮤지컬 보고 영화 보면 돈 나오나? 똑같다. 차라리 아이돌은 나 몰랐으면 좋겠다. 그냥 계속 꾸준히 좋은 퀄리티의 무대를 보여주고, 내 일상의 비타오백 정도만 되어줘도 나는 충분하다.

인생이 지루하다면, 일상에 새로운 자극이 필요하다면, 지금 유튜브를 켜 한 번쯤 아이돌 무대를 보시라. 생각보다 좋은 취미가 되어줄지도 모른다. 부끄러움은 떨쳐내고,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도 한 번쯤 거두고, 한 번쯤은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시라.


그래서 마지막은 다시 제목으로 돌아오겠다.


인생이 무료한 당신에게 추천합니다.

뭐를요?

아이돌 덕질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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